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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타 Sep 26. 2023

맛집과 먹방 너머의 행복

행복에 대한 단상

 순간적인 즐거움에 계속 반응하는 일이 때론 스스로를 파고드는 탐닉이 됨을 느낀다.

그중의 하나인 '맛집'.

맛집이라는 단어는 그저 음식이 맛있는 집, 음식을 잘하는 집이라는 칭호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한 마디가 인간의 식(食) 욕구와 욕심 하물며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람들이 마치 밥 먹듯이 쓰는 단어이다.


 음악, 향기, 음식, 사진... 종종 추억팔이로 울적한 시간을 날리고 살아가는 인간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경험은 참 좋았고 행복했던 지나간 기억과 추억이다.

우린 계속해서 그걸 상기해 낸다.

우리의 뇌는 생각을 잠시도 놓지 못하고 고프지도 않은 배꼽시계를 자극하기 마련,

그럴 때마다 자연스레 새로운 맛집을 찾는 욕구가 발동한다.

하물며 먹음직스러운 음식 사진만 봐도 침이 돌거나 입맛이 다셔지기도 하는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맛집을 찾아다니고 미식을 고집하고 집중하는 일은 반드시 물리적인 음식이 내 입에 들어와야 행복할 수 있다.

때마다 맛으로 미각이 충족되어야 즐거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과 감각의 패턴이 뇌에 자동적으로 입력되어 계속 반복된다.


그저 재미를 위해 먹방을 보고 맛집을 찾으며 소비하는 에너지는 건강함인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먹지 못해 대리만족하거나 집착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검은 에너지인가?



 이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 떠오른다.

그는 행복이 최고 선(善)이라고 했다.

여기서 '선(善)'이라 함은 좋은 것, 가치와 동일시된다.


행복은 '무언가'를 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가 아닌 그 자체로 자족적인 본래적 가치이다.

즉 행복은 다른 것을 위한 좋은 것이 아니라

 자체를 위해, 그 자체에 의해 좋은 것이다.

모두가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추구하는 대상인 최고의 선(善) 행복.

각자의 사람들은 무엇을 지향하고 살던지 간에 혹은 목표가 없을지라도

행복하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행복이라는 말속에 이미 긍정이 있다.

그렇게 자연스레 우리는 살아가면서 행복을 자신의 가치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가치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다.


음식도 마찬가지. 맛있는 것을 자꾸 찾으려 하다 보면, 당장 혹은 스스로에게서 멀지 않은 상황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힘들어진다.

살기 위해 먹는 것과 먹는 즐거움은 '먹는다'라는 것에서는 교집합이 있지만 맛집, 먹방이 떠오르는 요즘 사회에서는 조금 다르다고 본다.

맛집과 먹방을 매번 검색하고 소비하고 있다면 그러한 행태는 한 사람의 많은 삶의 방식을 비춰낸다.

또한 그는 그저 배고픔의 본능을 따르는 것 이상으로 점점 불필요한 욕구를 스스로에게 장착하는 셈이다.


남이 먹은 맛있는 음식을 나도 맛보고 경험해보고 싶은 욕구는 사회적 욕구의 일종이다.

그것이 과도해지면 은연중에 인간을 허무함과 상실감의 늪에 조금씩 가까워지게 하고

그리고 마치 어딜 가나 통과의례 마냥 음식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도 노골적이지 않더라도 본능적인 차원에서의 인간의 과시욕이다.

이러한 욕구는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과도해지고 그것에 탐닉할수록

사람들의 삶을 비슷하고 단순하게 만든다.

보이는 삶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는 이라면 은연중에 허무함과 상실감의 늪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을 것이다.

불현듯 어느 날 공허함이나 외로움을 느끼는 스스로를 발견하지는 않을는지.

 

 끊임없이 맛집을 찾고 먹방을 보며 만져지지 않는 대상과 현재 하지 않는 사운드에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은 비단 식욕을 떠나서 해결되지 못한 마음 한 구석 결핍의 SOS나 다름없다.

맛집과 먹방을 과도하게 소비하는 것은 음식이라는 아우라(원본성)는 당장 내 앞의 시공간에 없는 채로 남들이 소비하고 정의해 놓은 것을 갈구하고 받아들이는 시뮬라시옹, 원본 없이 대량 복제된 가상을 끝없이 소비하는 상황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 시뮬라크르: 플라톤의 철학에서 언급되고, 장 보드리야르에 의해 구체화된 이론으로
 원본이 실재하지 않은 채로 복제된 현실이자 원본화 된 복제를 가리킨다.


가벼운 정도를 넘어서 매번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푼다거나

음식 조절이 힘들고 매우 음식에 얽매어 있다거나

모든 식이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 들(나 역시 경험자이다),

그 문제의 뿌리는 음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고 마음의 문제는 주로 음식이 아닌 주위의 환경이나 상황,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만족감의 축적, 혹은 외부로부터의 상처들에서 온다.

이러한 상황에서 음식은 한 사람의 생활 패턴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놀라울 정도로 스스로를 갉고 파내는 아주 집착적인 성향의 인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의식주(衣食住) 중에서도 매일 가장 쉽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행위인 식(食)에 불협의 과녁이 꽂히기 쉽다.


그런 편협해진 상태에서는 더욱이 스마트폰으로 보이는 남이 사는 삶을 부러워하고

남이 먹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게 되기 쉽다.

끊임없이 미디어와 스마트폰의 세계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현재의 삶들,

넘쳐나는 먹거리와 그 사이 선택의 문제, 선택과 욕구와 건강 사이의 문제.

마치 페로몬 같이 내 관심을 자극하고 발걸음을 움직이게 한다.

또 그게 축적되면서 어느새 내 삶을 좌지우지하고 내가 사는 방식으로 자리 잡힌다.

사려할수록 인간은 왜 이리도 연약한 팔랑귀인지... 애달픈 지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과 정신과 행동은 따로 놀고 건강에 이상이 올 때쯤

이건 아니다 싶은데 그땐 헤어나기가 힘들다.


 음식은 매일의 생존을 위한 영양임은 당연하고

가끔씩 맛있는 것으로 인한 즐거움을 느끼는 정도가 바람직하다.

음식이 아니더라도 뭐든지 특정한 대상에 너무 일희일비하며

사물이나 현상에 스스로 매달린 밧줄 같이 사는 삶은

조금 고루하게 뭉근히 살아가는 것만 못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행복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고 행복하기 위해서 성공하려고 하는가?

행복은 어떠한 목표를 이루는 것에서만이 아닌 몸과 마음이 겸허히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로의 합일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흔히 '소확행'이라는 것이 소소한 것에서 느끼는 행복이라고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정한 소확행은 그냥 작은 일에

잠깐 행복감을 느끼고 마는 것 이상의 무언가라고 본다.


그 무언가는 나의 이상적인 목적이나 목표를 두고 그걸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해도

그저 일상의 작은 것에서 행복을 '발견' 해낼 줄 아는 능력이다.

그것은 시시각각 급변하는 외부의 상황에 지침 되어 있지 않고 누군가 알려주지 않는다.

행복은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논리적으로 감각과 지성을 통해 긍정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리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둘 수 있는 사람의 기쁨이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감사함이 마음의 밑바탕에 선행되어 있는 이들이 느끼는

온몸의 감정이자 삶의 활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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