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alone
주변 사람들에게 수줍게 독립사건을 고백했을 때, 모두가 놀랐으나 아무도 나를 걱정하지 않았다.
외로움? 쟤는 허구한 날 혼자 공연 보고 해외여행 다니는 애잖아.
무서움? 집 앞이 바로 경찰청에 홈CCTV도 달았더라.
배고픔? 인스타를 봐봐 혼자서도 얼마나 잘 먹고 다니는데?
심지어 걱정이 일인 엄마마저도 내 걱정을 할 계획은 없어보였다. 독립하기에 부족함 없는 믿음직한 성인으로 취급된다니 다행인데, 걱정을 안 한다니 마음이 편하고 좋기는 한데, 그게 또, 너무 다들 그러니까, 흠.
그러나 양심 있는 어른으로서 이 미묘한 서운함을 어디에도 토로할 순 없었다. 정말이지 매일매일이 바쁘고 즐거웠기 때문이다. 오늘은 뭘 타고 퇴근해볼까, 어느 길로 가볼까, 저녁으론 뭘 먹어볼까, 다이소와 오늘의 집*에서 뭘 지를까 같은 신나는 고민이 끊이지 않는 날들이었다. 그동안 계획 세우기의 즐거움만 알았는데, 나의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온전히 통제하는 기쁨도 만만치 않았다. 전결권자가 된다는 게 바로 이 맛인가, 이래서 다들 권력을 탐하고 우두머리를 꿈꾸는 걸까.
회사 근처로 이사 온 덕분에 부쩍 여유로워진 저녁시간은 금세 취미생활로 가득 찼다. 월요일과 수요일엔 테니스, 화요일과 일요일엔 발레, 금요일엔 피아노에 틈틈이 경복궁 런데이*까지! 혼자 경복궁 돌담길을 뛰던 날, 엄마와 함께 보던 북한강의 석양이 생각나면서 새삼 독립이 실감 났다.
첫날엔 돌담길 길목마다 포진해있는 경찰들을 보고 괜히 겁을 먹었더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색 아이템으로 무장하고 뛰는 나를, 갑자기 불러 세워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까만 마스크와 모자를 뚫고 나오는 나의 선량함을 알아챘는지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이제는 그들에 대한 정의를 바꿨다. 밤에도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우리집 앞마당 지킴이들이라고. 덕분에 어둠을 뚫고 달릴 힘이 난다.
달리기를 하는 날이면 북촌에서 저녁을 먹곤 했는데, 성수점과는 달리 한가로운 다포케 안국점에 꽂혀 2주 내내 포케*만 먹은 적이 있다.(아직도 종종 땡긴다.) 어느 날엔 그 유명한 소금집 잠봉뵈르*에 반해 기나긴 대기를 피하기 위한 눈치싸움을 일삼다가, 배달의 민족에서 주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열심히 달리고 돌아왔는데 내 사랑 소금집 잠봉뵈르와 노티드 도넛*이 문 앞에서 어여쁘게 날 기다리고 있을 때의 행복이란.
주말은 오로지 내 통제 범위라 더더욱 신이 났다. 일요일마다 브런치 맛집을 발굴하러 다녔는데 덕분에 서촌은 물론이고 북촌과 삼청동, 정동 인근을 샅샅이 산책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보물찾기처럼 우연히 팝업스토어나 특별전을 발견하고 관람하는 재미는 덤.
토요일은 7년째 고정적으로 데이트를 이어오고 있어서 다른 이벤트를 즐기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주로 집에서 만나기 때문에 아침에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 특히 근처 영화관에서 여운이 남는 영화 한 편을 보고 주말을 시작할 때의 뿌듯함이란! 이게 다 독립영화의 메카, 광화문 씨네큐브가 도보 10분컷인 덕택이다. 덕분에 2021년의 인생영화 '쁘띠마망'도 만날 수 있었고, GV*행사로 배우 유태오도 직접 볼 수 있었으며, 그러다 탄력을 받아 충동적으로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식을 보러 1박 2일로 부산을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틈틈이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총 76편의 영화를 관람하며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독립 전에도 욕구 충족의 우선순위는 있을지언정 하고 싶은 것과 먹고 싶은 것을 참았던 적은 없다. 다만 이제 이 모든 것이 우리 동네에서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바로 할 수 있다는 것, 거기에 더 이상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극한의 자유를 느낀다. 거기에 우연히 발견한 간직하고 싶은 조각들, 그러니까 겨울이 오기 전 주말마다 브런치를 먹으러 갔던 카페 테라스에서 느꼈던 가을바람이나 안국동 블루보틀 카페 3층에서 바라보는 해 질 녘 한옥의 빛깔, 달리면서 보았던 밤이 찾아오는 현대미술관의 모습, 필름카메라 원데이 클래스에서 우연히 발견한 갤러리의 신비로운 입구, 골목을 산책하다 만난 고양이들 같은 것 덕분에 외로울 틈이 없었지 싶다. 정정한다, 행복하지 않을 틈이 없었다.
*오늘의 집 : 집 자랑도 할 수 있고 집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어플로, 다이소가 가성비 아이템들의 향연이라면 오늘의 집엔 쓸모보다 예쁨이 앞서는 인테리어 템들이 많다. 하여 ‘예쁜 쓰레기 컬렉터’인 나에게 이 어플을 추천해 준 사람을 원망한다. 그 언니 때문에 내 미니멈 라이프는 다음 생을 기약해야만 한다.
*런데이 : 체력 거지도 30분 달리기를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아주 획기적인 운동 어플이다. 8주 24회 코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상한 목소리의 트레이너가 달리기 방법을 시의적절하게 알려준다. 심지어 힘들어서 욕이 나올 타이밍에 용기를 북돋워주는데, 남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나 같은 사람마저도 감화되어 끝까지 달리게 하는 마성이 있다. 격일 주 3회 달리기를 권장하며, 일정 기간 이상 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때문에 대한민국 스테디셀러 ‘수학의 정석’처럼 뒷부분에 비해 앞부분의 반복 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것이 모든 이용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포케 : 하와이 음식이라고는 하나, 샐러드에 현미밥을 넣고 연어, 참치 같은 해산물을 얹는 것으로 사실 특별할 건 없다. 겉보기엔 샐러드인데 밑에 현미밥이 두둑이 깔려 있어 다이어터의 양심과 포만감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것이 인기의 주된 요인이 아닐까 합리적 의심을 해본다.
*잠봉뵈르 : 바게트 빵에 얇게 저민 햄과 버터를 넣은 샌드위치다. 요즘엔 풍미가 좋은 버터를 시중에서 구하기 쉬운 편이라 결국 햄의 퀄리티가 잠봉뵈르의 품질을 판가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동네에서는 서촌의 고트델리, 북촌의 소금집이 유명하며 고트델리의 2층 한옥뷰가 치트키인 점을 제외하면 맛으로는 소금집 압승. 심지어 고트델리는 피클을 돈 받고 팔기 때문에 나 같은 한국인 정서에는 다소 맞지 않는다.
*노티드 도넛 : 최근 몇 년은 도넛 춘추전국시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울 3대 도넛으로 불리는 노티드, 올드페리, 랜디스가 대표적. 그중 하나인 노티드 도넛은 지점이 가장 많아 접근성이 높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안국점은 항상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줄이 길다. 그래서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손님들을 배불리 먹인 후 산책하자는 핑계로 데리고 가서 ‘저 긴 줄을 봐, 저게 바로 노티드 도넛이야. 하지만 우리 집은 배민이 되지. 시켜놨으니 얼른 집에 가자’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GV : Guest Visit의 줄임말로 영화의 감독이나 배우가 와서 무대인사 등을 하는 행사를 말한다. 애정이 있는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는 재미도 있지만, 배우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즐거움도 있다. 퇴근 후의 GV 관람은 회사의 아저씨들로 잔뜩 오염된 안구와 고막을 아름다움으로 정화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종종 명상을 뛰어넘는 마음챙김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