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alone
수많은 사회 초년생들이 도전과제로 삼는 가계부 작성은 나 또한 시도했던 전적이 있다. 운 좋게도 아이폰의 활발한 보급과 함께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어렵지 않게 수입과 지출을 기록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저 기록만 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억눌러왔던 소비욕구를 분출하는데 크나큰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살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은 배송 지연을 발생시킬 뿐이라는 믿음을 갖고 옷과 가방을 수집했다. 그 와중에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남들처럼 돈을 관리해 보겠다고 통장 쪼개기를 했는데, 소비용 통장에 한 달 예산을 넣고 체크카드를 사용하는 것이 바로 그 방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결국 체크카드는 유사 신용카드가 되고 말았다. 잔액 부족으로 혹시나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까, 잔액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미리미리 돈을 채워놓았던 것이다. 참 든든한 후원자가 생긴 기분이었다. 그게 나라는 점이 조금, 아주 약간의 문제일 뿐.
결국 소비형 인간의 목표 없는 가계부는 일기장으로 전락했고, 미용실 방문 주기를 가늠하는 용도로 사용하다 곧 때려치우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건 감정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느새 물욕이 많이 사그라들어 쇼핑이 예전처럼 즐겁지만은 않아졌다. 나의 소비욕구가 진정한 내 욕구인지, 아니면 기업으로부터 주입 당한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패스트 패션으로 인해 버려지는 옷더미 사진을 본 이후로 이 옷이, 이 가방이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눈에 아른거리는 쓰레기 옷으로 뒤덮힌 산을 생각하며 점점 물건보다는 경험에 더 많은 투자를 하기 시작했으며, 요동치던 카드값은 자연스럽게 적정 수준에 수렴했다. 그래서 또 가계부를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하여 노동자 생활 11년 6개월 만에, 내 인생에 ‘주거비’라는 계정이 생기고 ‘외식비’가 ‘삼시세끼 식비’로 탈바꿈 한 지금에야 가계부 작성에 재도전을 하게 되었다. 목적을 갖고 쓰는 가계부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첫 달의 지출을 토대로 월 예산을 설정하고 계정 별로 예산을 조정하는 행위는 변수투성이인 삶을 통제하는 느낌이었다. 식비에 10만원의 초과 예산을 부여하기 위해 경조사비의 예산 현실화를 하고(겸사겸사 갈까 말까 하는 결혼식도 안 가고), 커피와 건강보조식품 구매 예산을 줄이는 등의 행위가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아 즐겁기까지 했다. 외식을 줄여 보겠다고 쓱배송을 잔뜩 시켜 요리를 하다가 음식물 쓰레기를 대량 생산하는 점까지 ‘식비 절감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 같달까. 옛날에 하던 편의점 게임, 붕어빵 타이쿤 혹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RPG 게임이 뒤섞인 느낌이었다.
게다가 가계부 화면 안에서만 쓰이고 수정되는 숫자들을 보고 있으면 사이버 머니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재화로 교환이 되고 나서야 가치가 실감이 났다. 아, 그래서 내가 지난날들 그렇게 열심히 무언가를 샀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노동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역시 내가 하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어. 이렇게 또 급작스럽게 과거의 나에 대한 애정으로 마음이 벅차오른다.
6개월 정도 꾸준히 기록을 한 결과 예상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독립 전과 후의 카드 명세서 숫자가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주거비의 대부분이 현금으로 나가는 것을 감안하면, 이 만족도 높은 독립에 드는 비용이 월세밖에 없다는 것이!
신기해서 하나하나 따져봤더니 원래도 외식비와 생활용품 지출이 적지 않았기에 큰 폭으로 증가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옷장에 공간이 없어서 쇼핑을 줄였더니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거기에 혼자 여기저기 구경 다니기 바빠서 (어딘지는 전편 ‘독립 어때?’를 참고하시라) 뮤지컬 보는 횟수가 줄어드니 ‘관리비+통신비 = 뮤지컬 vip 2장’의 셈법이 가능했다. 내 공간이 있으니 더 이상 서울 호캉스 갈 일도 없고, 7만원의 통근 교통비가 0원에 수렴하면서 전체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카드값이 나오게 된 것이다.
가계부 쓰길 참 잘한 것 같다. 아니었으면 독립이 이토록 비용 대비 효용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몰랐을 테니. 그동안 돈을 주고 산 자유와 행복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거의 공짜로 얻은 기분이 들어서 더 신이 난다. 드디어 넷플릭스 기계에서 벗어나 다른 쓸모를 찾은 내 아이패드도 나만큼 행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