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와 퇴직 예정자와의 만남
관점이 달라진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달라진 건가요?
저는 퇴직하면 정말 심적으로 편한 사람과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최근에는 가짜 관계를 많이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관계가 넓어진다고요? 무슨 말씀이세요?
퇴직자 그룹과 퇴직 예정자 그룹의 집단 인터뷰가 끝났다. 각각 한 시간 정도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었다. 이번에는 두 그룹을 미팅룸에 모았다. 서로 해주고 싶은 이야기,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참석자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니, 서로 인사도 하면서 이야기를 해보면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의도도 있었다.
인터뷰 참석자는 모두 9명이었다. 먼저 사회자가 각 그룹에서 나온 중요한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였다. 퇴직자 그룹에서는 퇴직 후 시간이 여유로워졌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경조사비가 부담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댄스, 테니스, 걷기,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고 소개하였다.
퇴직 예정자 그룹에서는, 퇴직은 본성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보상적인 의미가 있다, 재정적인 부분에서 좀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치매와 같은 뇌질환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지방정부는 일자리와 재능기부를 연결해 주는 플랫폼을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어서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퇴직자들은 퇴직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말하고 퇴직 예정자들은 퇴직하기 전에 각자가 준비하고 있는 내용을 이야기했다. 서로의 소감을 모두 듣고 난 다음, 퇴직예정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관점이 달라진다는 내용과 관계가 넓어졌다는 내용에 대해 그 이유를 듣고 싶다고 했다.
대기업을 퇴사하고 계약직으로 공공기관에서 일을 하고 있는 퇴직자는 업무에 임하는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퇴직 전에는 모든 업무 처리의 기준은 '이익'이었다. 비용 대비 효과를 기준으로 일을 처리했다. 양보보다는 경쟁이었다. 30년을 직장을 위해 몸을 불살랐던 그녀는 퇴직 후 기준이 달라졌다. 퇴직자는 자신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중심을 잡는다고 하였다.
이번 프로젝트가 장기적으로 부산에 좋은 일인가?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이 사례를 남기는 게 좋은가?
해야 되는 일이라면 나에게, 우리에게 피해가 오더라도 감수할 건 감수하자.
다른 퇴직자는 '현직이 멜로라면 퇴직 후는 블록버스터'라고 비유했다. 영화의 장르가 바뀌는 것처럼 삶이 딴 판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요? 나는 재차 물었다. 퇴직자는 나의 배역과 역할이 바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퇴직자 두 분의 말을 새겨보면 퇴직이 얼마나 개인에게 큰 충격을 주는지 알 수 있다. 퇴직 예정자의 입장에서는 짐작을 할 수 없다. 생각의 틀이 바뀌고 역할이 바뀌는 '퇴직'은 준비만 철저하게 하면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쩌면 착각일 수도.
나는 요즘 나의 명함을 다시 써 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소속과 직위, 사무실 주소, 직장 이메일 주소가 모두 스르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은 이름뿐이다. 다행스럽게 박사학위를 하나 준비해 두었다. 나머지는 다시 새겨 넣어야 한다. 나의 배역은 무엇이 될까? 나는 이 사회에서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질문자의 의도는 명확하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짜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가짜 미소를 지어왔는가? 퇴직 예정자는 이제 그런 위선적인 삶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퇴직한 사람으로부터 다시 관계가 넓어진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퇴직 예정자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퇴직자는 쉬운 예를 들었다. 예전에는 아파트 재활용품을 버리는 날이면 물건만 휙 던져 놓고 일터로 쏜살같이 달렸는데 이제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플라스틱과 페트병을 분류하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댄스를 배우는 이웃 주민을 알게 되었다. 함께 라인 댄스를 배우게 되었다. 이제 서면역에서 재능기부도 한 번 해볼까, 하는 욕심도 생겼다며 웃었다.
다른 퇴직자 한 분은 수영장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직장 다닐 때는 수업시간이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풀에서 나왔다고 한다. 반별 단합을 위해서 회식날짜를 알려줘도 바쁘다는 핑계로 빠지기 일쑤였다. 이제는 수업이 끝나도 풀장에 남아 연습을 조금 더 하면서 회원들에게 말도 먼저 건다. 음료수라도 한 잔 하려고 기회를 본다고 했다.
행복은 '좋은 관계' 속에서 나온다. 억압적이고 소모적인 관계과 끝나고 자발적이고 생산적인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계기가 바로 '퇴직'이다.
내게 행복감을 주는 '좋은 관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사람을 잘 살펴보면 옥석을 가릴 수 있다. 가짜 관계는 퇴직과 함께 봄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퇴직하고 나서 잘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부터 마음을 쓰자. 마음만 쓰려고 애쓰지 말고 형편 되면 밥이라도 한 번씩 사자.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돈 가는데 마음 가고, 마음 가는데 돈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