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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시헌 Apr 28. 2024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위대한" 집사 스티븐스

<남아있는 나날(가즈오 이시구로)> 리뷰

스티븐스는 달링턴 가의 저택에서 집사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긴 외출이나 여행을 해본적이 없다. 달링턴 가에서 저택을 처분하고 새 주인 미국인 패러데이에게 맡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패러데이가 반농담조로 스티븐스에게 여행을 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지한 성격의 스티븐스조차 패러데이의 권유를 들은 당장에 여행에 대해 고려해보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권유였으니, 어쩌면 스티븐스의 모험은 무산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달링턴 가에서 함께 일하던 옛 동료 켄턴양, 지금은 벤 부인에게서 편지가 오자, 안 그래도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던 차에 함께 반가운 마음으로 먼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6일에 걸친 여행 동안 스티븐스는 평소에 계획적인 성격과는 달리 사소하지만 다양한 돌발 상황을 맞이한다. 평생 처음 경험하는 즉흥적인 즐거움이 마음에 든 그는 그런 일들이 떠올리게 하는 예전 달링턴 가에서의 삶에 대해 회상한다.  

스티븐스가 들려주는 여러 기억들의 주제는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 자신의 철학이 녹아든 달링턴가에서의 여러 에피소드들이다. 위대한 집사에 대한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앞서 자칭 일류 집사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했던 집단, 헤이스 소사이어티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티븐스에 의하면 헤이스 소사이어티가 정해놓은 회원 자격의 기준은 저명한 가문의 소속이되 사업가나 신흥부유층의 출신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때 사업가나 신흥부유층의 자제가 헤이스소사이어티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품위'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티븐스는 신분 차별을 하는 이 집단의 속물 근성을 비판하면서도 바로 이 품위라는 것 자체는 위대한 집사의 핵심 덕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품위는 무엇인가? 스티븐스가 생각하는 위대한 집사가 지니는 품위의 기준을 알고 싶다면 그의 아버지를 보면 된다. 스티븐스의 아버지는 스티븐스가 태어나기 이전에 첫째 아들을 남아프리카 전쟁에서 잃었던 경험이 있다. 이때 아들이 죽은 이유는 그 작전을 이끌던 장성이 무리한 전략을 폈던 탓인데다가 작전의 명분 또한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들을 죽이려는 것이었기에 스티븐스의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에 느꼈던 상실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바로 그 장성을 파티에서 모시게 되는 일이 있었다. 실제로도 장성은 존경심이나 동점심도 하나 없이, 비만에 흉측하고 매너도 없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를 마주치자마자 아버지는 극심한 증오를 느꼈지만 장성을 시중드는 동안 어떠한 사적 감정도 표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티븐스가 생각하는 품위란 이처럼 전문가적 실존에 충실하면서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티븐스는 그렇다고 품위를 지키는 사람에게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문가적 “실존”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의지가 자신이 맡은 역할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럼 스티븐스 자신은 어떠한가? 우리의 스티븐스는 겸손하게 자신은 위대한 집사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부족하다고 말하며 대신 그에 근접했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달링턴 가에서 국제적으로 중요한 회담이 있기 2주 전, 스티븐스의 아버지가 쓰러지셨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주인이었던 달링턴뿐만 아니라 동료 켄턴 양도 무척 그의 아버지를 걱정해드렸지만, 정작 스티븐스 자신은 아버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집사의 본분을 다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회담 당일, 스티븐스의 아버지는 중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누는 대화에서도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회담 내내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여러 경고에도 스티븐스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바라시는 것은 집사의 분분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끝내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야기 끝에 스티븐스는 바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않은 판단이 자신의 집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에 근접했다며 뿌듯해한다.

하지만 때로 그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나마 서로 자주 다투었지만 친분이 있었던 켄턴 양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해고될 때에도 사무적인 말투로 이 비윤리적인 명령을 하달하기만 하고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 경우가 그렇다. 켄턴 양은 평소의 그의 ‘품위'의 방식에 대하여 항상 반기를 들고 인간성을 좀 가져보라고 늘 경고해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스티븐스의 품위에 자주 상처를 받았지만 그에게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켄턴 양은 결혼을 하면서 달링턴 가를 떠난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현재, 스티븐스는 여행의 목적이었던 켄턴 양, 지금의 벤부인을 만나게 된다.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달링턴 가에 대해 언급을 하게 되자 벤 부인은 만남의 끝에 스티븐스에게 젊을 적 스티븐스와 결혼하려는 생각도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물론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말을 덧붙이며 한 말이었는데, 스티븐스는 이 말을 그대로 인용하며 남은 삶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할 뿐 벤 부인의 말에 공감하지 못한다.

스티븐스의 위대한 집사는 단순히 전문가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직업 정신에 비유하기에는 인간성의 범위에서 벗어난 접이 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자신은 양심을 따르는 자유인이라고 주장하며 여행의 마지막에 가보면 생전 처음보는 사람들과의 조우를 즐거워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인다. 이렇게만 보면 스티븐스는 모순된 내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이때 영국인으로서의 ‘품위’를 다른 정념에 패배한 민족들은 가질 수 없는 고유한 덕목으로 여기는 등 지나친 민족주의적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 스티븐스의 면모를 보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오른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나치스 친위대 돌격대 지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상대로 한 국제 제판 보고서의 형식을 띄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에세이이다. 여기서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스의 사상을 지나치게 내면화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 자체를 스스로 거세시켜 버렸다. 이는 나치스의 비인간적인 범죄를 합리화하기 위한 일상적인 용어들이 그의 의식을 침투한 결과라고 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사례를 악의 평범성이라 한다.  

스티븐스도 아이히만과 마찬가지로 품위라는 표면적으로는 일상적이지만 의미상으로는 극단적으로 현실과는 유리된 표현을 자신의 모토 혹은 의무로 삼고 내면화한다. 물론 그의 품위라는 사상은 나치스의 반유대주의와는 다르지만 공감하는 능력을 결여한 자폐적인 습성을 지니고 있음은 동일하다. 사실 스티븐스가 유대인들을 학살하지 않았을 뿐,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못한 일이나, 벤 부인의 인생을 건 고백에서 깊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것은 확실히 비인간적이다. 만일 스티븐스의 집 주인이 나치스 친위대였다면 그는 과연 악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가?  

이러한 면에서 소설 <남아있는 나날>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특수한 경우에서 보편적인 면을 이끌어낸다 한 인간이 어떤 주의나 사상, 심지어 일상적인 의식일지라도 이를 극단적으로 내면화하면 당장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충분히 비인간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스티븐스의 위대한 집사란 악인인가? 나라면 스티븐스에게 이러한 별명을 붙여주고 싶다. 악의 평범한 가능성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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