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티크 슈투름은 폐지 압축기를 35년째 관리해왔다. 긴 시간 동안 그는 수없이 책을 압축해야 했다. 하지만 그 일은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슈투름은 책을 폐기하는 과정에서 책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남몰래 책을 빼돌려 자신의 지하실에 쌓아놓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교양을 쌓게 되었고 니체와 괴테와 헤겔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어느 교수에게 몰래 책을 나누어주기도 하며 지식의 나눔을 즐겼다.
한편 슈투름은 마냥 폐지 압축기를 돌리면서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일단은 체력이 약하기도 했고, 쓰레기장 관리소장은 늘 슈투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자기 직업의 운명이었다. '나 홀로 예술가요,관객임을 자처하다가 결국 녹초가 되어버린다(p.15)'. 그의 표현대로 이곳은 철학자들과 작가들의 무덤이었다. 결국 이 책들은 폐지에 불과하고 언젠가 소각장에서 불에 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이들의 손을 거쳐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버려진 이 공동묘지는 슈투름에게 있어 아카데미와도 같았던 것이다.
슈투름이 말했던 인상적인 경험 중에 하나는 프로이센 왕실 도서관의 책들이 갑자기 대거 들어왔을 적의 이야기이다. 슈투름은 그때 총천연색의 잉크들이 짜여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눈물을 흘릴 정도로 책의 종말에 대해 가슴아파했다. 그래서 그는 "하늘이 인간답지 않듯이 인간도 인간답지 않다"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슈투름이 그와 같은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 것은 비단 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슈투름이 살아온 시대는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때의 참혹한 전쟁을 슈투름은 학자들끼리의 격렬한 논쟁에 비유하기도 했다. 패권적 이성과 욕망이 일치하던 시대였다. 2차 세계대전 시절 나치가 그와 가까운 사이였던 어린 집시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가스실에서 죽여버린 사건도 그의 회의주의를 짙어가게 만들었다.
슈투름은 세상은 후퇴하는 동시에 전진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와 쇠퇴가 맞물려 있다.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미래가 과거보다 나아지는 것 같지만 사실 근원으로서의 과거가 가장 이상적이라는 말이다. 그는 이를 예수와 노자에 비유한다. 예수는 끊임없이 골고타 언덕을 오르며 기도로서 세상을 바꾸려 했고 노자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본질에 도달하려 했다고 말이다. 이런 노스탈지어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어두운 방향으로 쓰러져간다.
그가 유일하게 위안을 삼았던 책을 몰래 훔쳐볼 수 있었던 폐지 압축기는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세상은 변했고 신 기술과 신 세대가 아무런 애정도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쓰레기에 불과한 '책'을, 아니 더이상 책이라고 불리지 않는 "종이 쓰레기"를 '처리'한다. 그들은 음료수를 마시며 아무 생각없이 일하고 있다. 슈투름의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 그의 안식처가 사라졌다. 그는 분노한다. 자신의 유일한 행복이 사라진 것에 분노한다.
그래서 슈투룸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의 옛 지하실로 내려가 아직도 남아있는 압축기를 가동시키고 한가득 쌓여있는 책더미 속으로 자신의 몸을 담근다. 압축기가 그의 몸을 반으로 접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책 속에 파묻혀 죽는다.
슈투름의 책에 대한 사랑은 어설픈 지적 허영과도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비록 공식 교육을 받지 못했을지언정 책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가장 가까운 자신의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지혜에 대한 열정과 갈망을 추구했던 사람이다. 나는 오히려 슈투름이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된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 입만 열면 시구와 철학을 인용하는 학자들이라도 슈투름처럼 절박하게 지식을 탐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과 운명의 잔인함, 그리고 세상의 어리석은 가치관을 한탄한다. 세상은 후퇴하면서 진보한다. 아니, 진보하면서 후퇴하던가? 슈투름은 그 어떠한 것이든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는 허무함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구원 속에 잠이 들었다. 자살할지언정 인간이 아닌 도구가 되는 것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기계소리와도 같은 고독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