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성에 던지는 물음표.
영화 『벌새』의 시작은 1990년대의 한 중학교 여학생의 일상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은희, 그림 그리기가 취미이고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으며, 공부는 그렇게 잘 하지 못한다. 한문 학원을 다니고 있다. 위로는 두 명의 남매가 있는데, 언니는 항상 놀러다니기만 좋아해서 부모님께 혼나고, 오빠는 성실하게 공부를 하는 모범생이다. 부모님은 떡장사를 하시면서 생계를 유지하신다.
이러한 장면들이 영화의 대부분이다.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학교 끝나면 한문 학원에 다니는 하루 하루들. 일상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은 오직 눈에 보이는 상황만을 고려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사실 이렇게 사소하고 미세한 일들 가운데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크고 작은 굴곡을 겪는다.
은희는 꽉 막힌 담임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오빠에게 습관적으로 맞는다. 온갖 상황들이 불편하고 우울하고 답답하지만, 그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낸다. 일상의 불완전한 “평화”라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러다가 은희의 작은 일상에 급격한 변화가 생기는 것은 새로 들어오신 한문 선생님을 만나서부터이다. 여자 선생님이시기에 딱딱한 남자 선생님들보다도 말을 붙이기 쉬웠을지도 모르지만, 무엇보다 은희는 한문 선생님이 자신을 공감해주고 이해해주는 것을 느끼고 바쁜 삶 속에서 소외되었던 자신의 연약한 내면을 끄집어낸다. 그러나 한문 선생님이 갑자기 학원을 그만두었을 때 원장과 싸우다가 학원에서 쫓겨나게 되고, 집에서 혼나는 과정에서 크게 다치게 된다.
그러던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일어난다. 학교에서 틀어놓은 뉴스를 보던 은희는 아버지에게 성수대교에 가지 말라고 연락을 하고, 아버지는 다행히도 무사히 돌아온다. 그리고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문 선생님께 편지를 적어 선물과 함께 드리려고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집에서 들은 소식은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뿐이었다.
영화 초반부에서 담임 선생님이 학기를 시작하면서 아이들에게 “우리는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죽어간다.”는 훈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말은 사실 어찌보면 죽지 못해 살아간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선생은 이를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현실의 고통을 자극제로 삼아 내일 죽을 듯이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은희의 일상 속 내면적 고통을 보면 이는 부조리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처럼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저 일상을 반복해 나가는 과정일 뿐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영화의 문제의식은 정상성이라는 삶의 형식이 어떠한 것인지 물음을 던진다.
이러한 인생이 가능한지는 은희가 성수대교에서 아버지를 구한 반면에 한문 선생님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에서 결정이 된다. 여기서 각각의 장면은 거대하고 비현실적인 비극과 일상적인 불행들을 병치시킨다. 그들 중 어느 것이 더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거시적이고 단편적인 사건 못지않게 미시적인 시공간 안에서 지속되는 일상이라는 감옥도 은희에게는 다를 바 없이 괴로움이다. 결국 인생에서 정상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면에 한문 선생님이 남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중략)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그렇다. 일상 속 정상성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오류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 가운데 불행이 끊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안과 기쁨 또한 냇물이 흐르듯이 고요히, 가늘게 이어져가고 있다. 한문 선생님과 은희의 관계처럼.
나는 사실 일상 속 은희의 불행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만큼 고통스럽게 영화를 보기도 했다. 이미 이 영화를 보는 나도 일상의 괴로움을 느끼는데 영화 속의 작은 불행들조차도 나에게는 버거웠다. 그래서 사실 이 영화는 “일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결론으로만 마무리 지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의 한문 선생님의 편지를 들었을 때는 어떠한 아늑함이 느껴졌다. 담임 선생님의 훈계를 듣고 떠오른 말이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나온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겨라)”라는 안티 테제였던 것처럼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온 축복을 감사하며 놓치지 않는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