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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먼 Nov 13. 2023

2023년 11월 13일 - 명문대에 가야 하는 이유

또다시 기말 시즌을 맞이하는 요즘이다.


조기졸업 때문에 어거지로 욱여넣은 내 6 전공 시간표를 들여다본다.

응용물리화학

응용유기화학

응용무기화학

응용생화학

무기화학실습

생활 속의 화학

싹 다 화학이다. 아주 진절머리 난다.


이 6 전공 시간표로 올 A+을 목표로 공부한다.

난 대학원 입시를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변변치 않은 대학의 재학생인 내가, 저 높은 엘리트들한테 뭐라도 들이밀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니까.

조기졸업이든 연구 경험이든 논문이든 높은 학점이든 뭐든 가릴 처지가 아니다.

최대한 나의 무기를 만든다.

같잖은 나를 치장할 무기를 최대한 만들어 본다.


요즘 들어 종종 후회를 한다.

“역시 좀 더 좋은 대학에 갔어야 했나…”

내가 포기했던 내 내신 성적에 미련을 갖는다.

지금 학교보다 두 라인 정도는 높게 갈 수 있었던 그때의 성적에 미련을 갖는다.


고3. 그때의 나는 오만했다.

그래서 내가 일군 3년간의 내신 대신 재수를 택했고,

그러다 재수 1년간 몸도 마음도 모두 망가져버렸고,

결국 두 라인 낮은 학교 3군데에 원서를 내어

아빠의 반강요로 그 3군데 중에서도 가장 낮은 학교에 들어왔다.


스무 살, 스물한 살의 나는 시간 강박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내신 성적으로 삼수 아닌 삼수를 하기엔

대학 한 두 라인의 차이는 내가 잃는 1년보다 무의미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대신 대학을 조기졸업해서 시간 경쟁력을 벌자는 마인드였는데….


요즘 들어 그때의 결정이 잘못됐었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한 달 전쯤, 카이스트에 갔다 왔다.

대학원 면담 때문이었다.

서울대 교수님 4분께 컨택을 거절당하고 오기가 생긴 탓에

새로 찾은 카이스트 교수님께는 정말 지극 정성으로 메일을 써서 컨택을 했다.

면담하러 오란다. 처음 받아보는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너무 긴장돼서 3시간 밖에 잠을 못 이루고

우황청심원을 마시고 면담을 들어갔다.

결과는 어땠냐고?

망했다. 그것도 아주 시원하게.


보통 대학원 면담은 그냥 인성면접처럼 한다는데,

그때 내가 했던 것은 전공 압박 면접이었다.

수도 없이 전공 관련 질문을 하는 교수님께

나는 초반 한 두 번 빼고는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1시간 10분간을 전공지식 속에서 허우적거렸고

끝내 교수님은 나를 거절하셨다.


그 뒤로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그렇게나 가치 없는 사람인가.’ 따위의 생각도 많아졌지만,

‘저 사람은 대체 어떤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걸까 ‘ 따위의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저 사람은 나와 격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면담을 하면서 아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교수님을 생각하면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저 사람이 나를 볼 때, 대체 얼마나 하찮아 보였을까. 얼마나 초라해 보였을까.

차라리 저 사람에게 알몸을 보여주는 게 덜 창피할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같은 화학과라고 말하는 게 죽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또 화가 났다. 나를 우물 안의 개구리로 만든 모교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모교의 동기들과 교수들에게 화가 났다.

왜 겨우 나 같은 거에게 뒤처지는지,

왜 당신들은 나를 이리도 안일하게 만들었는지,

왜 이 과에서 가장 잘난 내가

이 사회에선 이리도 멍청해지는지.

뭐라도 붙잡고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유튜브에서 명문대 관련 영상들을 찾아본다.

누군가는 명문대를 안 가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래도 성공할 놈은 성공한다며. 자기만 열심히 살면 되는 거라며.

“까고 있네.” 혐오감에 비웃음이 난다.

내 눈엔 그저, 실패자들의 자기 합리화 욕구를 노려 조회수나 뽑으려고 만든 영상처럼 보여서.


대학교는 인생의 가장 청춘의 시간 속 4년의 환경을 조성한다.

명문대에 가야 하는 이유는 ‘나를 둘러싼 환경’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지 고등학생 때의 나는 몰랐다.


나는 변변치 못한 대학을 나온 탓에

우리 학교 화학과에서 카이스트 대학원에 간 선례가 없었다.

그래서 타대 학생에 비해 이 학교에 나를 더 철저하게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또한 타대에 비해 교과과정이 약해서 전공지식의 총량이 타대 학생들보다 적다.

따라서 나는 겨울방학 동안 따로 인강을 결제해 부족한 전공지식을 채워야 한다.

그리고 내가 있는 자대의 랩실은 인프라가 부족해서

실험기기를 쓰기 위해 타대 랩실에 가서 추가 실험을 해야 하며,

자대 랩실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는다 해도

타대 랩실에서 일한 경력보다 낮은 스펙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서운 건

그 환경에 적응해 안주하는 동기들이다.

나같이 능력 강박이 있는 사람조차도

그 속에 있으면 그들의 안일함에 섞여 안주하게 된다. 도전하고 싶지 않아 진다.

그게 나를 정말 미치게 만든다.

내가 두 라인 위의 학교에 갔으면 이럴 일은 적었을 텐데.

내 후회는 여기서 비롯되나 보다.


내 주변에는 나보다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 없다.

내게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게 외롭고 또 아쉽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동기부여만 되는구나.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구나.

내 앞을 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쫓아가면 될 텐데.

나는 쭉 나 홀로 마라톤 경주를 하겠구나 싶다.

정말 나 혼자만의 싸움이겠구나 싶어 외로워진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멘탈 단단히 잡고 깨지고 박는 수밖에.

대학 간판으로 나를 판단하는 이들에게

나를 더 철저하게 증명하는 수밖에.


내가 무능한 건 절대 견딜 수 없으니 최대한 발악해 보련다.

나를 봐라.

내가 지금은 한낱 벌레 같은 존재로 보일지라도,

그래서 아주 쉽게 지르밟고 갈 수 있는 무가치한 존재로 보일지라도.

괜찮다. 오히려 좋다.

최대한 나를 쓰레기 보듯 봐라. 최대한 무시해라. 그렇게 방심해라.

언젠간 내가 반드시 두배로 되갚아줄 테니까.

내가 반드시 너네들을 지르밟으며 경멸 또는 동정 어린 시선으로 봐줄 테니까.


나는 절대로 무가치하지 않다며 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소리쳐본다.

목에 핏대를 세워서. 실핏줄 터질 때까지 눈에 힘을 주고 악으로 깡으로 외쳐본다.


패배의 열등감을 연료 삼아 매 순간 악을 쓰며 나아가겠다.

오늘도 그리 다짐한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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