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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Apr 23. 2023

멋진 인생

그림책을 읽어본다 18: <Drop Dead> (털썩 넘어져 ...)

<Drop Dead>         Babette Cole        1996       Red Fox   



영국 작가 배빗 콜의 <Drop Dead>라는 그림책 제목을 한국말로 넣기 위해 그림책 사이트를 여기저기 찾아보았다. 콜의 작품이 제법 번역되어 있는 듯한데 이 그림책의 번역본은 찾을 수 없다. 제목이 '참 그래서' 번역할 생각들을 안 한 것일까?


'Drop Dead'를 느낌 그대로 부드럽게 한글로 써내기 위해 머리를 비우고 "아-랄-랄-라" 하면서 편하게 생각하고 써봐도 제대로 나오지가 않는다.

사전에는 drop dead를 '급사(急死)하다'라고 하고 있는데, 그건 아니고.

“이렇게 난리를 치며 세상 위태위태한 짓 하며 맘대로 살아왔는데 그래봤자 이제 털썩 나자빠져 죽는 것 -즉 Drop (Down) Dead- 밖에 더 남았어?"라는 마지막 말씀에 새겨진 단어라 '급사'같은 위급함을 포함한 뜻은 아니다.

그리고 "말씀"이라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손녀 사이의 이야기라 그런 것인데, 웬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함부로 하실까?

애들 상대라고 있는 걸 아닌 척 내숭 떠는 말은 하지 않는 솔직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솔직한 말씀은 위트와 유머에 얹혀서 소화가 잘 되게 만들어져 있다. 배빗 콜의 트레이드 마크다.


배빗 콜은 늘 "무정부주의적", 그리고 "유머 있는"이라는 평을 받는 작가지만 이 <Drop...>가 과격하게, 어린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세상사를 다 읊는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단지 애들이 주름이 쪼글쪼글한 노인네들, 게다가 이 이야기 속의 할아버지 같이 뒷머리에 머리카락이 조금 남았을 뿐인 양반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인간의 노쇠에 관련된 질문을 던질 수가 있기 때문에, 이럴 때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하는 길을 생각해 본 것뿐인 것이다.


질문: "할아버지, 할머니는 왜 이렇게 주름이 많고 머리카락이 없어요?"

대답 선택지가 별로 많진 않지만 예를 든다면 아래와 같을 수 있다.

1. '욘석들, 늙으면 다 이래.'

2. '어른한테 그런 말 하는 것 아니야.'

3. '우리가 금방 태어난 아기였을 때도 주름이 쪼글쪼글했고 머리털이 없었어'라고 시작해서 그간의 굵직한 인생사를 있는 대로 이야기하면서 오래 살면 그사이 생겼던 머리카락은 없어지고 없어진 주름은 다시 생긴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3번 선택이 제일 돋보이긴 하는데 그럴 경우에는 인생 이야기를 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고 새로운 수위 조절의 문제가 생긴다.


배빗의 조부모님들은 3번을 선택했는데 하필이면 화끈하게 일생을 살아온 분들이라 내용이 좀 과격할 수 있지만 순화하지 않고 '그렇게 남달리 신나게, 마음대로, 위험하게' 살아왔는데 결국은 남들처럼 "죽어 자빠지는 것이지 뭐"로 마무리한다.

좀 거친가?

그래도 순화 대신 이야기에 유머를 충분히 섞어 넣어 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Drop Dead>는 "재밌고... 과격하다..."(Delightful... Radical...)라는 평을 듣는다.


<Drop...>가 과격하고 웃긴다는 평가는 그의 평이한 글과 튀는 그림의 종합 결과물에 기인한다. 그림이 글과 달리 튀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서 글을 읽어보면 유달리 차분한 서술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그의 삽화는 연한 펜화 밑그림을 또 연하게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하고 여백을 배경으로 많이 써 차라리 조용하다. 그런데 위트와 과장을 섞어 표현한 이미지가 '남달리 신나게, 마음대로, 위험하게'를 전달해 준다.


예를 들어,

집에서 말썽 많은 유아기를 보낸 주인공(조부모)이 학교에 가기 시작한 사실은 한 줄로 담담하게 썼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Then we went to school).

거기에 맞추어,

학교 건물 전체를 멀리서 조망하고 있는 삽화는, 교복을 차려입은 두 주인공이 남학생과 여학생용으로 나뉜 입구를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벌써 집채 만한 괴물이 학교 건물을 지붕부터 휩싸 안고 굴뚝을 물어뜯고 있다. 말썽이라면 둘째 가기 서러운 아이 둘이 학교에서 일으킬 난리를 상상해 보라. 2020년대 식으로 표현한다면 그 학교 선생님들이 허둥지둥 사표를 던지며 뛰쳐나오는 모습으로 대체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배빗 콜은 90년대식으로, 언제나처럼 품격 있게, 그래서 더 무섭게 그려놓았다. 학교 건물 전체를 정면에서 감싸고 있는 나지막한 담 위에 우아한 장식처럼 그러나 너무 촘촘히 꽂힌 쇠 살창이 그 품격의 과격함을 전해준다.     

   

어린 시절에 이 아이들이 하고 논 게임도 그림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글은 아이들이 게임을 하고 놀았다고만 하는데,

여섯 살 즈음에는 킥보드를 타고 둘이 내달으면 사자가 으왕하고 쫓아가는 게임,

그다음 열 살 즈음은 둘이 자전거를 타고 쌩 내달리면 사자는 힘에 부쳐 이를 악물고 헐떡이며 쫓아가고,

마지막엔 16살 먹은 두 악동이 오토바이를 타고 날고 있다. 사자는 이제 어떻게 쫓아가?

저도 오토바이 타고 따라간다.

(여기서 웃지 않으면 배빗 콜에게는 미안한 일 일 수 있다. 그러나 절대 실패 없이 웃고 만다.)   

           

그렇게 커서 주인공들은 대학에 들어가고 여전히 "실험적으로" 인생을 살았더니, 공부한 이과 전공으로 취업은 못하고 할아버지 악동은 스턴트맨이 되고 미래의 할머니는 배우가 되어 진짜 연기를 하게 되었는데 (Grandma became a famous film star!), 예를 들어 달리는 말에서 아름답게 떨어지는 역할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걷어 차여 창고의 통나무 벽을 뚫고 나가떨어지는 할아버지보다는 확실히 좋은 직업이었다.


둘은 후에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나일강의 전문적인 악어 씨름꾼이 된 그 아들이 '주름이 뭔지도 모르는 이 아이들'의 아빠가 되었다는 내용으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현재, 인생의 마지막에 두 노인네는 여전히 가끔 그 실험적인 인생 과업을 진행해 보지만 별 관심을 끌지도 못하고, 스스로 이제 갈 날만 남은 것을 알기에 자신들의 화려한 인생 이야기를 손자녀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작가는 어린 (혹은 늙은이) 독자들을 고려하여 죽어 넘어진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은 묘사하지 않고 두 양반의 긴 다리가 풀밭 위에 (혹은 초록색 카펫 위에) 털썩 떨어진 그림으로 갈음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양반들은 여전히 튀는 구두에 양말까지 맞춰 신고들 계시다.


할머니가 주름이 많은 이유도 모르는 철없는 손자녀에게 '인생 별나게 살았다고 해도 결국은 다 똑같이 때 되면 죽는 거야'라는 말을 해야 되는 것일까, 해도 되는 것일까? 인간의 노쇠와 소멸을 사탕발림하지 않고 그대로 설명해 주면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과정이 죽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이치를 쉽게 받아들일까? 또 주변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을 사는 대로 산 인생의 결론이라고 받아들일까? 혹은 특별히 잘 살았다고 잘 죽는 것도 아니고 다 똑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편안해질까?


그에 대한 대답은 순전히 우리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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