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읽어본다 19: <Clarice Bean, That's Me>
<Clarice Bean, That's Me> Lauren Child 1999 Candlewick Press
나는 고등학생 언니와 중학생 오빠 그리고 나이도 모르겠는 왕재수 남동생이 있는, 초등생이다.
이렇게 형제가 많고 할아버지도 같이 사시고 또 근처에 사는 삼촌과 어린 사촌들도 들락거리는 집이라 늘 시끌벅적한 것이 난 진짜 싫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견딜 수 없는 일은 왕재수 남동생과 내가 방을 같이 써야 한다는 사실이다. 방바닥에 줄을 좍 그어 놓고 한 발짝의 반의 반이라도 넘어올 경우 그냥 두지 않겠다고, 그렇게 경고하는데도 내가 늘 왕재수에게 당하는 것만 같다.
언니 방을 기웃거리며 벽에 붙은 남자 친구 사진을 보거나 언니 화장품도 좀 만져 보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교를 떨어보지만 언니의 마지막 대답은 언제나 같다. "열까지 세기 전에 가라."
오빠는 아예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엄마는 오빠가 사춘기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문이나 좀 열어보라'는 아빠의 성화를 말린다. 자기 방에 혼자 들어앉아 있는 것이 무슨 "힘든 시간" 이란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난 안다. 아빠는 집에서 정신없다가 출근하면 높은 빌딩의 자기 사무실에 앉아서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빠가 혼자 있고 싶을 땐 전화하면 회의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는 거다.
엄마는 네 명이나 되는 자식과 요란한 집 때문에 본 정신으로 살 수가 없다고, 그래서 혼자 요가를 하고 뜨거운 욕조에 들어앉아 고래 울음소리를 들으며 스트레스를 푼다. 내가 곁에 얼른거리면 엄마는 "뒷마당에 나가서 한바탕 뛰어라" 한다.
뒷마당에서 옆 집 담에다 감자를 던지는 건 약간 재미있다. 그렇지만 뒷 집의 2% 모자라는 지질한 머슴애가 "뭐 하니? 나도 시켜줘" 하고 머리를 드밀면 완전 기분 잡친다. 맨날 내가 하는 것만 따라 하려는 창의성 없는 놈이다.
그런데 오늘은 쥐 같은 왕재수가 나를 갈군다. 이것이 내 침대 위에서 축구를 하는 것이다. 난 화가 나서 녀석의 이불을 창문 밖으로 던졌는데 그게 마침 옆 집 개 위로 떨어져서, 아빠와 옆 집 아저씨가 말싸움을 했다. 뭐가 안 되는 날인가, 대단히 성질부린 것도 아닌데 아빠는 나에게 "넌 지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쁜이 그런 것 아니니 조용히 있어라" 한다.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짜증 나서 왕재수를 보니 요게 고소하다는 듯이 싹 웃는다. 그냥 먹던 스파게티를 녀석 머리 위에 부어 버렸다..아...
'아, 왜 또 이렇게... 뭐가 이렇게 안 되는 거야!!!'
원래 그러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일파만파 난리로 치닫은 상황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부모님한테 혼 날 것이 걱정도 되는 클래리스는, 총천연색의 세계에서 갑자기 암담한 흑백의 세계로 떨어졌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흑백 체크무늬 안락의자 끝자락에, 눈은 한껏 모아뜨고 인상을 쓴 채 오도마니 앉아 있는 그녀 역시 흑백 인간이다. 얼굴은 물론 몸통까지 굵고 거친 느낌의 펜으로 테두리만 그려져 있고 치마도 펜으로 마구 뻗쳐 그린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무엇보다 얼굴 위로 여러 가닥 길게 늘어 뜨린 머리카락이 그녀의 복잡한 심사를 보여준다.
화면의 배경은 페이지 끝에서 끝까지 퍼렇게 칠한 녹색이다. 이 녹색은 '아이, 내가 또 왜...'라는 클래리스가 순식간에 빠져버린 막막함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식구들이 모두 삭제된 퍼런 녹색 배경화면 앞에서 흑백의 존재가 되어버린 클래리스의 묘사는 '걱정과 후회의 심정, 그녀의 무참*함을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자신으로 인해 시끄럽게 된 상황을 후회하면서도 모아 뜬 눈이 증거 하듯이 클래리스에게 항복은 없다. "행동을 하기 전에 생각이라는 걸 좀 해라"는 엄마의 나무람을 다소곳이 받지 않고, 물론 소리 내지 않으며, '내가 생각을 했으면 스파게티가 아니라 타피오카 푸딩을 왕재수 바지 속에다 부어버렸지'라고 되뇐다.
마침내 벌이 떨어졌다.
아빠가 내린 것인지 아니면 엄마인지, 벌은,
"네 방으로 가. 거기서 3 시간 동안 꼼짝 말고 혼자 앉아 반성해"다.
클래리스는 이제 신나는 오렌지 색 세상에 있다. 오렌지 배경 앞에 놓인 큰 방석 위에 펼치고 앉은 클래리스는 평상시와 같이 색깔 옷을 입고 빨대로 주스를 마시며 그림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여전히 모아 뜬 눈이지만 살짝 아래로 깔린 눈동자가 '나 원 참'하는 듯하다.
벌서는 방이 신나는 오렌지 색인가?
그건 '왕재수 없이 평화롭고 조용한' 방을 차지한 클래리스의 일성이, "아, 좋아."이기 때문이다.
작가 로렌 차일드는 굵은 펜으로 휘갈기듯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색의 물감을 자유롭게 칠하고 또 사진을 오려 콜라주를 넣고 하는 등의 다양한 기법을 썼다. 모든 페이지 화면이 정신없도록 자유분방한데 본문의 글자 모양과 크기도 다양하게 설정하여 글로 이야기의 감정선까지 보여주고 있다. 평등한 구성원이 만들어 내는 평화로운 가족은 어떤 정해진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작가의 신념을 그녀의 화면 구성에서 읽을 수 있다.
멋지게 시끄럽다.
그러나,
후회에 가득 찬 녹색 세상, 색깔이 다 사라져 버린 무참함의 흑백 심상, 그리고 작은 반발심이 실려오는 거친 펜의 흐름 중심으로 <Clarice, That's me>를 풀지 않으면 이 이야기는 자칫 중산층의 어리광으로 들릴 수도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無慚: 어이없는 실수 때문에 창피하고 후회스러운 마음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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