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읽어본다 20: <셜리야, 물 가에 가지 마>
<Come Away From the Water, Shirley> John Burningham 1977 Thomas Y. Crowell
존 버닝햄이 <셜리야, 물 가에 가지 마>에서 그려내는 해변에는 자갈돌이 너무 많다. 가족이 해변으로 들어서는 이야기의 시작에서부터 화면 아래쪽에 자잘하게 깔린 자갈이 눈에 걸린다.
원래 돌이 많은 유럽 해변이고 동네 근처 조그만 해변가 이야기라고 알고 읽지만 책의 왼쪽 페이지에 계속 보이는 자갈돌 때문에 "발바닥"이 아프다.
더구나 이야기의 마지막, 세 식구가 해변을 빠져나가는 장면에 이르러면, 식구들이 자갈 무더기를 넘어 나오는 듯이 보인다. 뒷모습을 조금 멀리서 잡은 탓도 있겠지만 페이지의 거진 반을 자갈 무더기가 덮고 있다.
이럴 때는 소용도 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아니, 미스터 버닝햄, 왜요? 이건 어린 셜리의 머릿속에 일어나는 바닷가 판타시를 보여주는 이야기 아닌가요?'
작가의 의도에 집착한다.
'이렇게 많은 자갈돌을 그려 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의문에 매몰되어 마지막 페이지 가장자리에 3x3 센티미터 표시를 해놓고 그 안에 그려진 자갈돌을 세어본다. 53개의 크고 작고 길쭉, 동글, 넓적, 삐죽한 자갈돌이 그려져 있다. 이 많은 자갈을 하나씩 그려 넣은 마음은 무슨 마음이었는지가 궁금하다.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지경이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떴고, 그가 이전에 한 인터뷰들을 찾아본다. 마침, 독자의 반응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책을 만드느냐는 질문이 있다. 버닝햄은, "그런 건 전혀 생각에 없죠"라고 답한다.
그럴 줄 알았지.
버닝햄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뿐이고, 작가의 의도가 의미를 고정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으면서 나는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인가!
대 여섯 살짜리 딸을 데리고 엄마 아빠가 바닷가에 바람 쐬러 나왔다. 수영객이 몰리는 여름 철이 아닌 집 근처의 자그마한 해변은 이미 추워 보인다. 한적한 해변에 자리하고 앉아 바닷바람을 쐬고 어린 딸은 물 가에 서서 발도 조금 적셔가며 이것저것 만지고 쑤시고 놀다 가는 시간일 터이다.
엄마는 가방에 보온병과 뜨개질 거리를 담아왔다. 의자를 펴고 앉아서 엄마는 뜨개질을 시작하고 아빠는 담배 파이프를 한 대 피우며 신문을 본다. 딸, 셜리는 곁에 따라붙은 떠돌이 개를 거느리고 물 가로 달려간 듯한데 그림에 보이지 않는다.
셜리의 움직임은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선언문 같은 잔소리에서만 확인된다.
뜨개질을 하며 엄마가 하시는 말씀을 보자.
1. (혼자 그러고 있지 말고) 저기 저 애들한테 가서 같이 놀지 그러니,
2. 그 물껌정 신발에 안 묻게 조심해, 새 신이잖아,
3. 차 마실 건지 지금 세 번째 묻고 있어. 줘, 말아?
4. 그 개 쓰다듬지 마,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데,
5. 아빠가 좀 쉬고 나서 너랑 놀아 주실 거야.
용케도 딸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눈을 크게 뜨지도 않고 뜨개질을 하면서, 아빠한테 차를 따라 주면서 할 말은 다 한다.
말로 하는 이런 자식 간수는 엄마가 이미 해버리니 아빠는 일단 잔소리할 필요가 없어 한마디 말이 없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신문 보고, 그리고 차까지 마신 아빠는 이제 한 잠 졸기 시간이다.
딸과 같이 물가를 집적대며 노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새다. 그렇다면 멀찍이 앉아 바다도 보면서 혼자 노는 딸의 뒤통수라도 쳐다보면 좋으련만, 그 작은 뒤통수가 애잔하다는 것을 엄마, 아빠는 모르는 듯하다.
그림에 보이지 않는 셜리는 어디 있는가?
그림책은 왼쪽과 오른쪽 두 페이지로 장면이 나뉘어 있는데 나란히 앉은 부모님은 왼쪽 페이지에 보이고...
아빠가 비치체어를 펼 때 바로 물 가로 달려간 셜리가 오른쪽 페이지에 있다.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과 그 곁으로 떠돌이 개와 탈 수도 없을 것 같은 나무 쪽배가 보인다.
그런데 바다를 바라보는 셜리의 조그만 머리통 속에 무언가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엄마의 잔소리 속의 셜리 모습 대신 이제 오른쪽 페이지에는 그녀의 머릿속에 돌아가는 모험이 그려진다.
장대한 바다 항해의 모험이다.
해적들이 찰만한 긴 칼을 찬 셜리는 쪽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아가고 있다. 떠돌이 개를 옆에 거느린 그녀는 멀리서 지나가는 해적선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해적을 제압하고 그들에게서 보물지도를 뺏아 금은보화를 찾아오는 것이 셜리의 모험이다. 마침내 금빛 왕관을 쓴 승리의 전사 셜리의 모습이 보인다. 떠돌이 개도 아름다운 장식 목 띠를 걸고 있다. 둘은 해가 넘어가는 어둑어둑한 바다를 항해하여 돌아온다.
그때 마침, 엄마의 말씀이 들린다.
"어머나, 시간 좀 봐. 돌아갈 때가 넘었어. 서둘러."
아빠는 의자를 접어들었고 엄마는 한 손에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 셜리를 이끌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다.
팔랑팔랑 뛰며 해변에 들어서던 셜리의 모습과 달리 엄마 손에 끌려가는 듯한 셜리의 조그만 뒤통수는 왠지 애처롭다.
그러나, 셜리는 이미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저 애잔해 보이는 작은 머리 안에서 그녀의 강렬한 꿈이 피어났던 것을 우리가 방금 목격했다.
<셜리야,...>의 인물과 사물은 펜으로 간단히 스케치되어 있다. 버닝햄의 특징이다. 부모님이 등장하는 왼쪽 페이지는 연하게 크레용으로 채색하였고, 셜리의 오른쪽 페이지는 짙은 유화풍으로 처리하였다. 다양한 색과 콜라주 등의 기법이 사용되어 어른들의 건조한 일상과 어린이들의 현란한 꿈의 세상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발바닥에 계속 박히는 자갈 투성이의 셜리네 해변은 볼 수록 불편하다. 누군들 부드러운 모래결 해변을 꿈꾸지 않으랴. 하지만 현실의 해변은 작은 자갈돌로 덮여있다. 그래도 어른들은 늘 하는 식으로 그 해변에 자리 잡고 앉아 휴일 오후를 보내며 일상을 산다. 셜리들도 그런 대단할 것 없는 해변의 휴식 시간을 보내며 커간다. 그동안에 그들은 다만 아무런 표시도 내지 않고 장대한 바다 항해의 모험을 해낸다. 어린 마음은 그렇게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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