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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May 22. 2023

조용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끝까지

그림책을 읽어본다 21: <찬란한 비행>


<The Glorious Flight: Across the Channel with Louis Bleriot>    Alice and Martin Provensen    1983      Puffin Books.


'조용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끝까지'라고 제목을 우선 달았다. 브런치는 글쓰기 버튼을 클릭하면 시작부터 대문짝 만하게 '제목이 뭐냐고' 재촉하듯 하니,

'참, 제목을 정하고 쓰나'라고 하며 피하듯 했는데

이번엔 그냥,

'제목? 오케이. 제목 나갑니다'하고 그림책의 주제를 "때려" 넣었다.  

주제.

주제는 확실한데...


그러고선

며칠을 보낸다. 머릿속 저 뒤 어딘가에서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까... '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이 시작된다.


'그림책을 읽어본다'라고 부제목이 달렸지만 그림 이야기를 처음부터 했다가는, 또 그게 조금 진해지면 많은 독자들이 두 줄 정도 넘어 읽기 지루하고,

또, 살짝 길을 잘못 들면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서양 애들 이야기. 관심 없고, 패스‘가 주 반응일 수 있고...


인간사 드라마도 아니고--엄청난 드라마지만, 이혼, 파혼 같은 "쥬시"(juicy)한 내용이 아니고,

사회적 사건에 대한 공분을 촉구하는 글도 아니고,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이야기도 아니고,

새로운 정보나 공부도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데,

그림책 하나 들고

인간의 존재 본질과 연결되는 드라마 중 드라마인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쓰려하니


생각이 많을 밖에,

한 두어 시간 앉아 쓸 수 있는 글이 아닐 수밖에.


이리저리, 할 말들을 정리해 본다. 뭔가 울리는 것이 없다, 건조하다...


시간 너무 끈다고 브런치는 하늘색 방울을 달아 메시지를 보낸다,

"글쓰기는 운동과 같아서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근육을 기르는 게..."

나도 한 마디 한다.

'지금 글쓰기보다 중요한 운동도 못/안하고 있는 나에게 곱빼기 훈수 라니. 이건 뭐, AI야, Chat 머시기야, 훈수에 감정이 없네, 없어...'

'한 문장씩 써 놨다 다 모으면 그냥 글이 되는 게 아니랍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머릿속 저 뒤에 있는 그 흐릿한 느낌 덩어리는 생각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어느 오후에,

유튜브에서 화가 유영국의 전시회 관련 프로그램을 올려준다.

또 알고리듬이다.

언젠가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봤던 유영국의 전시회 소개다. KBS가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방송했나 보았다.


유영국 (1926-2002).

안다.

자기 혼자만의 그림을 그렸던 인물이다. 그림 공부도 혼자 하고 화단의 주요 화가가 된 후에도 아주 짧은 기간 학교에서 가르쳤을 뿐 조용히 계속 그림만 그렸다.

고향인 울진 앞바다와 산을 마음에 두고 그렸다고 했다.

짙푸른 파랑과 빛나는 초록,

그리고 아예 번쩍이는 노랑,

그리고 빨강.

혼이 피어오르는 듯한 빨강.

울진의 깊고 찬 바닷속을 생각해 보는 작가의 열망이 그 깊은 파랑 속에서 번뜩인다.

추상화라고 하지만 풍경화처럼 느껴졌다. 울진 바다 어디엔가 가면 그 아래에 저 파랑이 출렁이는 깊고 깊은 바다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다큐멘터리 한 장면에서 미술평론가 이인범의 한 마디가 번개처럼 날아온다.


"정말 올인이에요. 그러니까 정말 결사항쟁이에요. 자신의 존재를 그것으로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면  이게 무슨 인생이냐라고 할 정도의 몰입이 있다고요."*

다른 일을 하며 프로그램을 흘려 보던 중이었는데 그 말이 눈앞에서 번쩍하듯 했다.

"앗! 그거야."  

그게 바로 이 그림책의 주인공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림책의 등장인물들 중 남자들 대부분은 모두 도톰한 콧수염들을 하고 있다. 1890년대 말 당시 프랑스의 유행이었겠지. 그 콧수염이 왠지 비장하면서 코믹하다.


주인공은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자 엔지니어며 비행기 개발자다. 깨지고, 터지고, 부러지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비행기를 만들어 내고 날기를 시도했다. 궁극에 최초로 성공한 비행을 하기 위해 나섰을 때는 목발을 짚고 걸었다고 했다. 삽화는 그의 깨진 모습을 그리고 있지 않다. 대신 그의 콧수염과 초점 없는 눈매가 강조되어 있다.   

루이 블레리오(Louis Bleriot)의 초점 없는 시선은 독자를 향해 있지도 않고, 무언가에 홀린 듯하다.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하지만 그에게 보이는 것은 하늘을 나는 자신의 비행기일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웃음을 끌어낸다.

웃음.

진심으로 천진난만한 사람을 볼 때 나는 웃음, 그런 웃음이다.


그가 블레리오 I, II, III으로 순서대로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만들어 낸 "비행기"는 전혀 심각하게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최초로 제대로 된 비행을 성공시킨 11번째의 비행기 모델에 가기까지는.

이 누런 색 기조의 유화풍 삽화가 웃음을 유발한다면 그것은 기상천외의 모습을 한 비행기와 그것이 종이장처럼 구겨지고 망가진 모습을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봐서는 타 보지 않아도 실패가 뻔할 것 같은 모양새의 비행기와 그것이 처참하게 실패한 모습을 보고, '아이고, 이랬다는 거지' 하며 웃게 된다. 비행기 자체 동력이 없어 보트에 줄을 달아 끌고 가면서 띄우도록 설계된 비행기는 어쩌면 블랙코미디 같지 않은가? 보트를 그냥들 타면 되었겠는데...


그리고,

딸 넷, 아들 하나의 아빠인 그가 막내딸이 아기일 때부터 시작한 대장정이 성공적인 비행으로 이어진 때는 막내도 벌써 다 컸다. 가족 여섯 명이 다소곳이 격납고 앞에 도열하여 아빠의 성공 비행을 기원해 준다. 그 사이 무수히 망가지는 장면을 식구 모두가 오롯이 목도하도록 작가는 페이지마다 멀리 또 가까이 깨끗이 차려입고 지켜보는 자식들을 그려 넣었다.


그러니까 이 가족은 차분한 아이들을 대신하여 아빠가 꿈 찾아 좌충우돌하며 성장통을 겪고 다른 식구들은 그걸 지켜 봐주며 살았던 것이다. 온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찢어지고, 깨지고, 멍드는 성장통. 멋진 콧수염을 달고 있는 30대의 무모하다시피 한 순수함이 웃음을 준다.

그러나 진심인 블레리오는 어설퍼 보이는 비행기의 모습이나 한없이 망가지는 실패를 부끄러워하지도 사과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계속 나아갔다.


그러면서, 초점 없는 눈을 한 루이 블레리오가 11번째의 비행기로 프랑스와 영국 사이 해협을 36분 30초 날아 영국 도버에 착륙했다. 최초다. 그가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한 지 만 8년이 지난 1909년이었다.


"정말 올인이에요. 그러니까 정말 결사 항쟁이에요. 자신의 존재를 그것으로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면  이게 무슨 인생이냐라고 할 정도의 몰입이 있다고요."*


그래서 그의 비행은 '찬란한 비행'(Glorious Flight) 일 수밖에 없다.


아빠를 둘러싸고 비행의 성공을 축하하는 가족들은 이제야 화색을 띠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 사이의 마음고생은 이제 다 떨쳐버리고 독자들에게 멋진 아빠, 남편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명, 루이 블레리오 본인은 여전히 초점이 안 맞는 눈을 하고 얼굴에는 기쁨이 없다. 그는 어디 다른 곳에 있는가?

영국해협 횡단을 성공시킨 블레리오 XI은 완전히 개방된 비행기 몸체에 파일러트 한 명만이 앉을 수 있도록 설계된 매우 기본적인 구조의 비행기였다. 그 후 25년 동안 루이 블레리오의 비행기 열정은 끊임없이 진화해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34년에는 쌍발 엔진에 기체 몸통이 두 개로 되어 있는 블레리오 125를 만들어 내었다. 첫 비행 이후부터 유명인이 되어버렸지만 블레리오는 외부의 자극에 개의치 않고 평생토록 조용히 비행기 디자인 개발에 몰두했다.**


그러니까,

그는 한 번의 성공에 들뜨는 단순한 마음이 아니었던 것이며 그의 조용한 "결사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었던 것이다.  



유영국의 “결사항쟁”도 우리 곁을 지켜주고 있다.


"그림 너무 좋아. 작은 거라도 딱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

"아유, 이 그림들은 벌써 억 대야."

그때 그 찬란한 그림들 앞에서 나와 내 딸이 나눈 대화다.


유영국의 그림 값은 그의 소관 사항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그의 아내도 순진하고 소박한 어른으로 보인다. 그가 그림을 그려서 내다 팔고 또 내다 팔며 힘들게 가속을 먹여 살린 삶을 산 것은 아닌듯한데 혹시 그랬을까 봐 자료를 찾아보기도 겁나고 그 다큐멘터리도 정신 차리고 보고 싶지 않다.


그저,

조용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삶을 산 사람들을 부러움을 담아 기릴 뿐이다.

  


* ‘KBS 방송 특집다큐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 (유튜브).


** 세간의 관심을 무시해 왔던 블레리오가 단 한번 사람들 앞에 나선 것은 1927년 찰스 린드버그가 뉴욕-파리 간 논스톱 비행을 성공시켜 파리에 내렸을 때였다. 린드버그도 가장 만나고 싶은 프랑스인은 루이 블레리오라고 공언하였는데, 파안의 미소를 띠며 얼싸안은 두 비행 개척자의 만남이 대대적으로 매스컴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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