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읽어본다 30: <Nights of the Pufflings>
<Nights of the Pufflings> Bruce McMillan 1995 Houghton Mifflin Company
한 해가 지나가는 스산스러운 때에는 서로 따듯한 말을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는 따듯한 기억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그래서,
하나,
가요 경연대회가 한국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지 몇 년 된 것 같지만 이제야 유튜브에 올라오는 경연 장면들을 본다. 일생의 명운을 걸고 경연에 참가하는 가수들은 노래한다기보다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청중들은 노래를 듣고 즐거워하거나 감동하거나 하면 그만이지만 경연에 참가한 가수들에게는 조그만 반응도 심판의 칼날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수의 열창이 끝나자 청중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박수소리와 와-아하는 탄성이 잠시 일다 가라앉는다. 그중에 한 사람이 처음부터 "까아-아-악" 소리를 내지른다. 혼자 하다 보니 그 "비명"이 도드라져 좀 어색한데 그 까-아-악을 세 번쯤 한다. 마지막에는 그 소리밖에 들리지 않으니 더 어색하다. 그런데 그때쯤은 그 외마디 소리지름에 '아, 고맙다'라는 생각이 든다. 진력盡力을 다해 노래해 바친 가수에 대한 예의고 배려다.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본다. 볼 때마다 따듯하고 고맙다.
둘,
12월 초순이 넘어가면 미국 TV들은 크리스마스 관련 뉴스와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그중에서도, 산타 복장을 하고 다니며 크리스마스가 힘겨운듯한 표정의 사람들에게 100불짜리 한 장씩 들이미는 "비밀 산타" 이야기가 볼만하다. 물론 산타 얼굴은 보여주지 않는다.
최근에 본 산타는 코비드 몇 년 동안 유예받았던 집세 등의 지불 기일이 다가오는 때를 반영하듯 100불짜리를 비닐 커버에 한 장씩 넣은 1,000불짜리 미니 "담요"를 선사한다. 모두 그것을 받는 순간에 턱 숨이 막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짓는다. 천 불이라야, 130만 원 돈인데 그걸로 한 달 집세가 감당이 될까 말까 하지만 집세 탓에 꽉 막힌 숨통이 트일 것이다. 단 돈 100불로도 어린 자녀들 두, 세 명에게 줄 선물은 충분히 마련할 수 있고 그리고 선물이 없는 크리스마스의 끔찍한 추억을 아이들에게 남겨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상황을 견디고 버텨야 할 부모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100불이니 이런 때의 천 불의 가치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보아온 비밀 산타의 '100불 선사' 행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좀 오래된 된 것으로 경찰관- 산타 이야기다. 그 해에 산타는 지역 경찰서에 찾아가 경찰관들에게 100불짜리를 한 묶음씩 주며 크리스마스가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한 장씩 선사하도록 의뢰한다. 공권력으로 자주 비난받는 경찰관들이 시민들과 긍정적인 기억을 만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하는데 여러 의미에서 경찰에게 의뢰한 것이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차를 타고 시내를 순찰하는 경찰이 앞에 가는 차에게 서라는 신호로 '삐릭'하는 소리를 내면 그때 누구든 참담한 기분이 든다. 지은 죄라야 대부분은 의식 못하는 중에 속도제한이 내려간 곳을 달려버린 것 정도인데.
산타 대리 경찰이 외양이 주인 인생살이의 신산辛酸함을 그대로 전해 주는 듯한 차를 만나자 '삐릭' 신호를 보내 차를 세운다.
경찰이 다가가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건네자 차주인은 '정말 죽겠다, 내가 지금 티켓까지 받는단 말이지...'라는 표정으로 대들듯이 "당신이 세우기 전까지는 안녕했어요.."라고 말을 받는다. 그 표정이며 풍모며 인생이 지치고 크리스마스라 더 힘든 얼굴의 젊은 부인이다.
산타경찰이 눈앞에 100불을 들이밀며,
"이건 비밀 산타가 주는 선물이에요"라고 한다. 그 말에 여인은 목이 메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애들에게 줄 선물조차 준비하지 못해 힘들었다는 말을 겨우 한다. 이 장면은 여러 번 보았지만 볼 때마다 울게 된다. 열심히 살았지만 수 십 불 여유도 없는 것이 너의 잘못은 아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그리고 크리스마스날 실망할 아이들 생각에 숨통이 조이는 것 같은 며칠을 보내다가 그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 그녀의 가슴에 저미고 내 가슴에도 저며서 눈물이 저절로 나는 것이다.
100불 산타, 고맙고 따듯하다.
이제 따듯한 그림책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정확하게는 사진으로 만든 책인데, 아이들이 자기 안에 있는 따듯함을 발견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다.
셋,
멀리 아이슬란드에 녹색의 풀로 덮인 해변 기슭이 장관인 헤이마이 마을이 있다. 그곳에 봄이 오면 아이들은 한 번씩 바다 쪽을 바라본다. 4월쯤부터 먼바다에서 날아오는 퍼핀(Puffin)을 기다리는 것이다. 한 마리씩 날아오는 퍼핀이 바다 위 하늘을 까맣게 덮을 즈음이면 이제 헤이마이 마을의 해변 기슭은 퍼핀의 보금자리로 변한다. 해변 기슭 한 면에 암수 쌍을 이룬 퍼핀이 자신들의 둥지를 판 모습은 장관이다. 암 수 두 마리가 같이 한 번에 알을 하나씩 낳아 번갈아 품고, 새끼가 태어난 후에는 돌아가며 먹이 사냥을 나가고 바깥 물새의 공격을 막기도 하는 퍼핀의 분주한 모습이 바다 기슭에 펼쳐진다.
헤이마이의 아이들은 이런 퍼핀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8월이 되면 아이들은 더 퍼핀에 신경을 쓴다. 이제 곧 새끼, 퍼플링이 해변을 떠날 시간이 오는 것이다. 날 수 있을 만큼 날개가 튼튼해진 퍼플링들이 처음 비행을 시작하여 둥지를 차고 나와 바다 쪽으로 날아간다. 퍼플링은 밤에 달빛이 반사되는 바다를 향해 날아가지만 가끔은 시내의 불빛을 오인하여 마을 쪽으로 거꾸로 날아오기도 한다. 새들은 둥지에서 바다 쪽으로 한번 날아올라 바다 위로 내려앉고 점차 먼바다로 날아가게 되지만 도시 길바닥에 떨어져 앉게 되면 아직은 날개 힘이 약해 다시 위로 날아오를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렇게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지는 퍼플링은 동네 고양이나 개에게 잡아 먹히거나 차에 치이게 된다.
아이들이 기다려온 '퍼플링 찾는 밤'이 그래서 첫 번째 퍼플링들이 날아 나오는 밤부터 시작된다. 아이들은 준비한 종이 박스를 들고 동네 곳곳을 다니며 길 잃은 퍼플링을 찾아내고 다음날 바닷가로 나가 퍼플링을 바다로 날려 보내 준다. 두 손으로 퍼플링을 잡고 한 번, 두 번, 세 번 다리 사이로 세게 흔들어 날려 올려주면 퍼플링들은 퍼덕이며 바다로 날아간다. 약 2주 동안 아이들이 밤늦도록 퍼플링을 찾아다니고 다음날이 되면 날려 보내주는 일을 반복하면 이제 새끼들은 다 바다로 날아가고, 아이들은 아쉬운 작별 뒤로 퍼핀들이 다시 돌아올 후년 봄을 기약한다.
아이슬란드의 청명한 하늘과 바다와 퍼핀의 둥지로 가득한 해변 기슭의 사진이 아름답다. 하늘을 나는 퍼핀의 모습이나 동네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사진도 꼭 같이 티 없이 깨끗하고 평화롭다. 떨어진 퍼플링을 차지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까지도 즐거운 스냅사진으로 보인다. 아이들은 퍼플링을 구하기 위해 자기 집 고양이와 경주를 하고 있는 셈이다. 퍼핀이 제대로 떠날 수 있도록 챙겨 보내주면서 아이들이 자신들 속의 따듯한 마음을 찾아내고 있는 것 같아 흐뭇해진다.
*퍼핀, 퍼플링은 일상의 한국말로 된 이름이 없다. 그냥 섬 새의 일종이라고 사전은 말해준다. 이 동화책은 거의 30년 전에 출판되었으나 지금도 아이슬란드 여러 곳에서는 '퍼플링 구하기'(puffin patrols)가 매 해 계속되고 있다.
본 글의 내용과 사진 이미지는 저작자의 허락 없이는 어떤 형태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Copyright 2023 Jane. (삽화 Copyright 2023 m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