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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잔 Feb 14. 2023

#26. 부에노스아이레스, 그 잔잔한 여행

내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도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제 먹고 남은 푸아세타 피자(양파피자)에 콜라를 먹었다. 아침부터 피자에 콜라라니, 우리끼리 벌써 서양문화에 익숙해졌다며 웃었다. 실제로는 서양 국가들에서도 가볍게 빵만 먹을텐데, 그냥 합리화한 것 같기도 하고. 


배를 채우고 가장 먼저 Tango Porteño(포르테뇨) 티켓 예매를 위한 할인티켓부스를 찾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우연히 푸에르자 부르타 공연 티켓을 파는 할인티켓부스를 보았다. 원래는 내일 보기로 한 공연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오늘 티켓이 남았냐 물어보았더니, 직원이 하는 말이, '푸에르자 부르타는 지금 우루과이 공연 가서 공연 안해요.' 란다. 2초 간의 적막이 흐르고.. '네?' 둘 다 벙쪘다. 푸에르자 부르타는 K가 제일 기대하던 공연이었다. 나도 한국에서 몇 번 보려고 했지만 비싸서 보러 가기 어려웠기에 이 곳에서 단돈 만 원의 호사를 누려보려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운이 좋지 않다니. 충격받은 K가 스스로를 위안한다. '그래, 이걸 기회로 다음에 또 부에노스아이레스 오면 되겠다. 그렇지..?' 초점잃은 동공으로 긍정적인 말을 하는 K. 초점잃은 그녀와 함께 탱고 티켓 부스로 가서 저녁에 볼 포르테뇨 공연을 예약했다.


예약을 마쳤으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는 El altereo (엘 알테레오) 서점을 가보기로 했다. 가는 길에 사람들이 가방을 멘 모습들이 보인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동네는 좀 안전하고 부자 동네라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거기만 벗어나면 모든 사람들이 가방을 앞으로 혹은 옆으로 메고 있고, 옆으로 멘 사람들 마저도 그 가방을 한 손으로 꼭 쥐고 있다. '얼마나 소매치기가 많길래 그런 것일까?'싶으면서, 저 정도면 차라리 남미에서는 앞으로 메는 가방을 출시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인구당 가장 서점이 많은 도시 1위로 정평이 나 있다. 그 명성에 걸맞게 서점을 가는 길임에도 서점들이 즐비해 있다. 그렇게 도착한 엘 알테레오 서점. 외관은 전혀 특별함을 모르겠으나 안으로 들어가니 서점이 아니라 오페라 공연장의 모습을 띄고 있다. 아름답다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정말 공연장인지, 서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솔직히 말하자면 생각보다는 규모가 작았고 우리나라에 있는 서점들도 못지 않게 아름다운 곳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 거긴 오랜 역사까지 더불어 생각하다보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 된 것일지도.


음반 파는 곳을 보았는데, 역시나 외국은 LP판을 많이 판다. 나도 집에 턴테이블이 있어 몇 개를 사고 싶으나 집으로 가지고 갈 엄두는 나지 않는다. LP판이면 집으로 가는 길까지 모시고 가야 하니 말이다. 아직 그 정도의 마니아는 아닌가보다. 우리나라는 사실 LP판을 구하기 힘들지만, 외국에서는 최신 노래도 LP판으로 많이 나온다. 언젠가 외국에 살게 된다면 제대로 한 번 모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찬찬히 구경을 하고 밖으로 나와 근처에 있던 카페에 갔다. 우리의 금일 목적은 Media Luna(아르헨티나 스타일 크로아상)와 Alfajores(아르헨티나 대표 디저트)를 먹는 것이다. 우리가 갔던 카페에는 다행히도 그 두 가지가 모두 있었다. 너무 더운 날씨였기에 콜드브루 두 잔과 메디아루나 2개, 알파호르 하나를 시켜 먹었다. 


항상 커피를 마실 때마다 느끼지만, 역시나 남미는 커피가 맛있다. 더운 날씨에 시원하고 목을 타고 넘어가는 콜드브루. 메디아루나는 크로아상보다 작지만 속이 더 꽉 차있어서 크로아상보다 더 알차고 고소한 느낌이 들고, 알파호르는 워낙 달다고 소문 나 있어서 조금 겁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달지 않다. 공장에서 만들어서 파는 게 아니라 카페에서 직접 만든 거라서 그런가 싶다. 맛을 보고 나니, 알파호르는 한국으로 돌아갈 디저트 선물로 사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와 먹기에 적당했다.  


메디아루나, 알파호르, 콜드브루 두 잔


물론 내가 단 것을 좋아하다보니 생각보다 달지 않다고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 입맛엔 딱 좋았다. 그렇게 카페에서 둘이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 쉬다가 다시 지하철을 타고 시장에 갔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15분은 걸은 듯 하다. 평일이라 시장이 크게 열리진 않는다고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긴 하였으나 뭐가 없어도 너무 없다. 골동품 상점들과 잼 파는 곳, 그리고 내부 음식점들 일부만 열려있다. 시장 안은 남미에서 본 어떠한 시장보다도 제일 깔끔했다. 


하지만 너무 뭐가 없었기에 그냥 한 바퀴만 돌아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오늘의 가장 큰 수확이 있다면, 집에 오는 길에 소고기를 샀다는 것이다. 마트에서 샀는데 꽃등심 부위가 놀랍게도 450g에 3천원 정도 꼴이다. 싼 가격에 너무 기분이 좋아, 오늘은 집에서 코스 요리를 만들어 먹기로 한다.  


1차 스프와 파스타, 2차 스테이크


스프와 파스타는 타이밍을 맞추기를 실패하여 같이 먹게 되었다. 꽃등심 스테이크는 놀랍게도 남미에서 먹었던 스테이크 중에 정말 최고로 맛있었다. 우유니에서 만났던 언니가 아르헨티나에 가면 소고기를 밖에서 먹는 것보다 집에서 구워먹는게 최고로 맛있다던데 오늘에서야 느꼈다. 정말, 너무 맛있었다. 요리사 K가 잘 해서 그런것도 한 몫 하겠지. 


그렇게 배가 터지게 먹고 집 근처에 와이너리가 있다하여 가보았다. 가격을 보니 생각보다 좀 비싸다. 역시 멘도사에서 5병은 사야 했었나보다. 결국 와이너리에서는 그냥 구경만 한 채 탱고를 보러 출발했다. 엊그제 본 피아졸라는 음식점 안에 공연장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가 간 포르테뇨는 공연장 안에 음식을 먹는 공간이 있는 느낌이었다. 공연에 더 집중한 모습인 탓에, 입구에서부터 기대가 된다.


우리가 너무 일찍 도착해서 조금 기다려야 했는데, 1시간 쯤 콜라만 홀짝이며 기다리니 10시 15분, 드디어 시작한다. 참고로 이 곳은 휴대폰 촬영은 금지되어있다. 공연을 영상에 담기 위해서는 내 두눈으로 보는 것을 포기하고 그 순간을 카메라 렌즈를 거친 장면을 눈으로 담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실제로 그 공연이 주는 숲을 느끼지 못하게 되기 마련인데, 그래서 나는 영상을 찍는 것보다, 두 눈으로 있는 그대로를 감상하는 게 더 좋다. 사진을 찍지 못하는 강제성 때문에 나 또한 타인의 방해 없이 모든 순간들을 직접 담을 수 있어서 훨씬 좋았던 것 같다. 


공연은 그 시작부터 잊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없던 빈 무대부터 나를 압도한다. 대한민국에서 뮤지컬을 보러가면 볼 수 있을 법한 정도의 큰 무대. 든 한 장면 한 장면이 내 눈과 내 가슴에 담겼다. 전통적인 탱고 공연은 아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 형식을 빌린 듯 한 이 공연은,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리고 탱고 둘 모두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첫 시작은 전통적인 탱고 공연이었다. 네 팀이 나와 탱고를 추는데 기술 뿐만이 아니라 엊그제 공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애절한 연기까지 깃들어 있다. 처음의 그 장면만으로 충분히 무대에 매료되었다. 연주는 무대 바로 뒤 오픈된 높은 공간에서 한다. 탱고에 맞춰 연주를 하기도 하고, 공연 없이 악기만 연주 될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굉장히 눈에 띈다. 세 명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있었는데, 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연주자가 연주할 때면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바이올린은 슬픈 선율의 악기로만 생각해왔는데, 반도네온과 피아노 그리고 콘트라베이스까지 합쳐지니, 구슬프게 여겼던 바이올린 마저도 탱고에 어울리는 섹시한 악기로 변하였다. 오늘 하루만큼은 바이올린에 매료되었다. 


여러 종류의 공연이 옴니버스식으로 1시간 반 가까운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 하나하나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공연을 보다가 중간에 울컥하기도 했다. 공연에의 감동도 있었지만, 그 울컥함은 순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이 곳을 떠나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어디냐 묻는다면, 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라 말하겠다. 탱고는, 내가 그 정도로 이 곳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지막 커튼콜



K가 만약 푸에르자 부르타를 보러 여기 다시 오겠다 한다면, 나는 이 공연을 다시 보러 여기 오고 싶다. 나는 오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그리고 탱고와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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