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닮은 하루처럼_2024.09.10
Knock Knock?
녹(綠), 녹(綠)!
양산을 쓰고 뚜벅뚜벅 걸어낸 곳은 '허균, 허난설헌 생가터'였다. 초입구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들이 가득한 입구가 참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바랐던 '치유'는 바로 이런 공간에서였다. 녹빛은 심신의 안정을 주는데 기여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내가 그렇게 녹빛을 찾는 이유인가 보다.
입구를 따라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왠지 모르게 아늑한 길이 나온다.
입구로 향하는 길, 공중의 한가운데에 나비 두 마리가 날아들었다. 호랑나비 두 마리였다.
구애의 몸짓이었던 것 같은데 내게는 아름다운 한 쌍의 춤으로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도 사람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기꺼이 춤을 추어내는 나비들이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들을 따라 덩달아 함께 춤을 추고 싶어졌다.
오래된 것들은 본연의 빛을 잃기 쉽다 생각하지만 오히려 고유한 빛이 더 진해지는 것들이 있다. 한옥, 고목, 그리고 글.
낡고 빛바랜 한옥을 본 적이 있는가? 빛바랜 색이 그 건물의 고유한 색이 되어 자태를 내뿜을 때면 비로소 온전한 작품이 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그와 같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만의 고유한 빛으로 남아 온전한 나를 이루길 바라는 마음에서부터.
생가터 옆을 지키는 배롱나무가 더 작은 묘목들에게 그늘을 내어주고 있었다. 피어난 분홍꽃들이 햇빛을 받아 더욱 진한 빛깔을 뿜어냈고, 그 빛이 내 눈으로 들어왔다. 배롱나무와 눈을 마주한 나는 '예쁘다'를 나지막이 읊조렸다.
동네에서 똑같이 보던 배롱나무임에도 강릉에 오니 한층 더 고유의 진한색을 뿜어내는 듯하다.
정말 고요했다. 생가터 안쪽으론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느 커플 한 팀과 남성 한 분 밖에는.
하늘 위에 그려진 바랜 나무빛이 더욱 선명해진다. 문턱을 넘을 때면 잔잔한 나무향이 코끝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다.
터 안쪽엔 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 하나의 생명이 하나의 그늘을 만들고, 생명들이 모여 공원을 이루고 있다. 그렇게 수많은 생명들 앞에서 나라는 생명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한 번에 내쉬어본다.
‘하- 이거지. 내가 원하던 게 이거지.‘
하늘 아래 같은 풍경이 없고, 땅 위로 같은 하늘은 없다. 무한한 하늘을 땅이라는 하나의 지점에서 바라보다 보면 내가 마치 커다란 스노볼에 들어가 있는 작은 피조물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때 질문 하나가 스쳐간다.
'저 위엔 무엇이 더 있을까?'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허난설헌, 허균 기념관이 있다. 그곳을 둘러보고 나오면 정겨운 풍경이 하나 놓여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장소인데 더위에 잠시 땅을 내려다보고 있던 와중에 발견한 구조물이었다.
두 발, 한 발, 두 발, 다시 한 발로 착지. 그리고 돌을 줍고... 유년시절의 기억이 안개처럼 떠오르다 사라진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도 얼핏 지나간 듯했다. 땅에서 뛰어놀던 우리네 일상이 새삼 그리워졌다.
마지막으로 보라빛깔의 이름 모르는 꽃을 보았다. 그 많은 빛의 파장 중에 보라색 파장으로의 삶을 선택한 꽃인 거다.
드높게 솟구쳐 오르고, 더 오르고 올라서, 하늘에 더 가깝도록 피어나려 했을 꽃의 여정을 잠시 떠올린다.
우리도 그렇게 피어날 꽃임을.
레트로? 여기로!
가족여행으로 강릉에 왔었을 때 방문했던 카페 '애시당초'를 다시 방문했다. 카페 고유의 레트로한 분위기가 마치 옛 시대의 슈퍼를 떠올리게 했다. 평일이라 역시나 한적했고 자리도 넉넉했다.
시원한 동백꽃라떼를 주문했다. 그리고 당 충전을 위한 까눌레 하나도 같이 주문했다. 사실 까눌레는 이때 처음 먹어봤다. 남들이 '까눌레, 까눌레'를 외칠 때 나는 '안 먹을래, 안 먹을래'를 외쳤다. 내 취향 모음집에 없는 외형과 맛일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꼭 그러했다. 맛이 없진 않지만 독특한 식감이 한몫했다. 혹시 까눌레를 애정하는 분들에겐 잠시 스크롤을 휙 내려도 좋다는 말을 드린다.
주문한 까눌레에선 은은한 동백시럽 향도 느껴졌다. 독특했으나, 나에겐 소금빵이 최고다. 그래도 음료는 맛있었다. 맑은 루비빛을 닮은 동백시럽이 가장 아래에 깔려 있고, 휘휘 저어 마시면 고소하며 은은한 동백향이 흘러 들어온다. 시럽의 빛깔이 마침 컵받침으로 쓰인 천과도 색감이 어우러졌다.
까눌레 한입, 라떼 한 모금을 마시고 인테리어로 시선을 돌려본다. 종이로 된 레트로 달력이 벽 한구석에 걸려있었다. 그곳엔 오늘의 날짜가 적혀 있었는데, 윗부분에 뜯겨 나간 종이 부분이 나의 시선에 띄었다. 시간이 벌써 그만큼 흘러왔구나를 알려주는 듯해서.
이곳에서 내가 먹었던 건 아마 까눌레와 동백라떼가 아닌 ‘레트로’ 였던 거다. 레트로 한입에 시간 한 모금씩.
거의 다 왔어요 : )
땀을 하도 많이 흘리고 걸어 다녀서, 더 무리하면 내일 쓸 체력이 바닥날까 싶어 숙소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체크인을 하고 예약한 방으로 올라갔다. 문득 숙소의 이름을 골똘히 생각하다 '다온', '다 온', '다 왔다는 건가?'까지 질문을 던져놓는다. 던져진 질문에 답을 떠올리며 캐리어를 들고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도착해 방문을 열고 있게 된다.
방 내부는 무척 깔끔하고 인테리어의 감성이 좋았다. 아이보리와 우드톤이 섞인 방이었는데 기본 어메니티도 풍부했다.
2박 3일을 머물 예정이어서 수건도 넉넉히 채워주셨고 냉장고 속의 물도 4병이나 구비돼 있었다. 여성전용 방이라서 고데기까지 준비돼 있는 섬세함이 마음에 들었다. 사장님도 그만큼 친절하셔서 더욱더 기분이 좋은 숙박이 될 수 있었다.
'거의 다 온'. 내 삶은 어디쯤 와 있는 걸까? 볼 때마다 질문을 던지게 만든 숙소의 입간판에 카메라를 들이민다.
그 질문에 답을 달게 될 수 있다면 그때의 나는 어디를 향해 다 와 가고 있을까? 질문의 답을 떠올리다 살짝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백설기 같이 하얀 이불에 다시 집중한다.
아, 이불 참 포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