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익국어 May 11. 2022

당신을 위로할 수 있다.

문학을 배우면 좋은 점이 무엇인가?

교사 본인에게 재밌다는 이유로,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온당한 것은 아니다. 나는 문학 작품을 좋아하지만(좋아만 한다. 많이 읽지는 않는다.) 이것이 왜 꼭 학생들에게 교육되어야 하며, 왜 수능에까지 출제될 정도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그동안 쉬이 납득하지 못했다. 문학을 가르쳐야만 하는 직업을 지망하면서 이것을 왜 가르쳐야 하는지 대답할 수 없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나이가 차고 이런저런 경험을 해 보면서, 그리고 당해 보면서, 저 문제를 풀 수도 있을 법한 힌트를 몇 개 얻어낼 수 있었다.


좀 새는 얘기를 꺼내 보겠다. 국어교육의 여러 영역 중 내가 가장 자신있는 영역은 화법이었다. 성정이 예민하고 남을 곧잘 의식하는 나의 성격상, 그리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습관상, 말하기가 내게 어려움을 준 적은 별로 없었다. (물론 임용시험은 별개다. 화법 문제도 공평히 잘 틀린다.) 남들 앞에서 내비치기엔 퍽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나의 '화법 능력'에 어느 정도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요사이, 나의 그런 자부심을 뭉텅이째로 깎아가는 사건이 종종 일어났다.


나는 누군가를 위로해야 할 상황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세상을 오래 살아갈수록, 나에게도 내 주변에게도 기쁜 일보다는 그렇지 않은 일이 더 잦게 발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위로해야만 하는' 상황에 느닷없이 놓이는 경우도 많았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1시간은 너끈히 떠들 수 있다고 자부하던 나는, 그런 상황 안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의 언어가, 침전하는 상대방을 건져 내기에 너무도 유약하다는 생각. 심지어 나의 어쭙잖은 위로가 상대방을 더 깊은 곳으로 집어넣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애초에 인간은 남의 입장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으니 진정한 위로는 허상이라는 정신적 자위. 그런 의미없는 생각들만 머릿속을 혼란스레 채울 뿐, 내 입은 떨어지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지금껏 살아오면서 '괜찮은 위로 한 마디'를 들어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물론 내가 극심한 비탄에 빠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수도 있겠다만, 인간관계에 실패하고, 시험에 불합격하고 하는 고통 정도는 당시의 나에게 큰 상처였다. 당시에 추락하는 나를 위로하지 못한 친구들을 책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위로'라는 것이 나에게만 어려운 것은 아닌 듯 싶다. 내가 화자인 상황에서도, 내가 청자인 상황에서도, '위로'를 목적으로 한 말하기가 예쁘게 명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문학은, 비-문학에 비해 비-효율적이다. 문학적 형상화를 위한 다양한 장치들은, 상식적인 관점에서 표현의 경제성을 저하시킨다. 안그래도 발신과 수신이 어려운 메시지를 더 어렵게 꼬아 발사하는 셈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문학은 '위로'에 한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놀라운 명중률을 보인다. 심지어 그 문학 작품이 누군가를 위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거나, 그럴 목적으로 쓰인 것 같아 보이지 않아도 말이다.


예를 들어 보이고자 한다. 난 신기할 정도로 '펑펑 울지' 못한다. 인생에 '통곡할 만한 자리'나 순간이 없었던 게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겠다마는, 앞서 언급했듯 나는 성정이 예민하기에 자잘한 일에도 큰 상처를 받는 편이다. 정말 울고 싶을 때도 종종 있었다. 예컨대 작년 12월 31일, 시험 결과창이 그리 좋지 않은 결과를 내게 뱉어냈을 때. 합격선과의 점수 격차가 1 미만이었음을 확인했을 때. 이 지역에서 응시하지 않았다면 어디든 적어도 2차 시험까지는 쳐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약 1시간 가량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았었다. (정말 힘이 안 들어갔다.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누군가의 위로를 의식할 정신적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그냥 딱 10분 정도만 있는 힘껏 울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끝까지 안 됐다. 1시간이 지나고 친구랑 피자를 먹으러 갔고, 3시간이 지나고 적금을 깬 후 최신 스마트폰을 결제했다. 부모님은 돌아온 탕자같은 아들이 의외로 안 속상해한다고 기뻐하셨다. 나는, 피자를 먹어서, 가로로 접히는 스마트폰을 사서, 부모님이 안 슬퍼해서 기뻤다. 그렇게 그 일은 지나간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에 모 문학 작품을 읽었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사이에는 특별한 위로도 없었고, '그래도 넌 할 수 있어!' 같은 - 어우, 정말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위로. - 말도 없었다. 그리고 굉장히 오랜만에, 박지원의 <통곡할 만한 자리>에 나오는 내용마냥, 아주 개운하고 산뜻하게 울 수 있었다. 마치 꽐라가 되기 직전까지 술을 먹은 상태에서 속을 게워 내듯, 우는 과정에서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슬프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그냥 독한 술을 다시 뱉어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토한 후에 술이 깨듯, 시험 결과가 나를 쿡쿡 건드는 빈도수도 크게 줄었다. 그동안 내게 건네던 주변 사람들의 수많은 위로가 무색할 정도였다. 솔직히 남들의 그런 위로들은 꼬아 들었거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으며, 애초에 그리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문학'은 누군가를, 적어도 나를 위로할 수 있었다. 현 시점, 이것은 내게 가장 설득력 있는 '문학의 가치'다. 문학만이 아름다운 것은 결코 아니며, 문학만이 교훈을 주는 것도 결코 아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너무나도 많고, 교훈을 얻는 경로도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는 경험은 그리 많기가 어렵다. 그 희소한 것을, 신기하게도 문학은 할 수 있는 것 같다. 


문학이, 마치 약이나 백신처럼, 어느 상황에서도 어떤 상처에도 효과적인 위로를 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나는 문학이 든든한 밥 한 끼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믿는다. 몸이 아플 때 밥이라도 꼼꼼히 챙겨 먹으면 조금 나아진다. 평소에 먹은 밥심이 어쩌면 미래의 큰 아픔을 이겨내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문학을 나 역시 앞으로도 즐기고 싶다. 나의 아픔을 위로받기 위해, 그리고 미래에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이 좋은 위로 수단을 알려 주기 위해. 타지에 나와 살다 보면 '든든한 밥 한 끼'를 찾게 되는 경우가 많듯, 언젠가 학생들에게도 아픔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문학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 정도만 되어도 기분 좋게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이 정리되어 뿌듯하다.

작가의 이전글 함께 성장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