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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Jul 26. 2023

죽으러 학교에 갔다.

아침마다 교통사고로 차에 치이길 바라며 출근하던 때가 있었다.

그만둘 수도, 쉬어가는 방법을 찾을 수도 없는 때였다. 불가항력으로 삶을 내던지는 것 말고는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학교는 힘들었다. 나는 미숙한 교사였으며 어떤 학생들에게는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였다. 화가 난 누군가는 짜증을 냈고, 표현이 거칠었다. 교사의 책임감으로 예의 없는 행동에 혼을 내고 때로는 울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노련한 모습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때의 나는 교육이라는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 끊임없이 감정을 부딪히고 대화하고, 해결 방법을 찾고 실천하며 시간이 흘렀다. 감정에 휩싸여 화부터 내는 학생들을 이해하며 품이 넓어졌다. 상처는 단단해졌으며 수업과 학급 운영의 기술을 익혔다. 학생들은 예의 없는 행동이 누군가를 화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고, 잘못을 하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침마다 차에 치이길 바라던 초임 교사는 꾸준히 성장했다. 

나는 온전히 학생들로부터 그것을 배웠다. 학부모로부터 배우지 않았다. 


수년이 흘러 경력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학교가 무섭다. 세상에 대한 미움을 교사에게 투영하여 치기어린 반항을 하는 아이들은 무섭지 않다. 그런 시기임을 이해하고 정제된 언어로 대할 수 있고, 잘못을 엄하게 가르칠 수 있으며 이 모든 과정의 끝에 따뜻하게 말을 건넬 수 있다. 

나를 뒷걸음치게 하는 건, ‘예의 없음을 택한 학생들’이다. 성장의 과정에 보이는 충동. 반항심, 감정 조절의 미숙함도 아닌 합리적 선택으로 교사를 함부로 대하고자 마음 먹은 아이들이다. 그런 학생들과 교사 사이에는 학부모가 있다. 또래 사이에서 교묘하게 서열을 올릴 방법으로 교사를 수단으로 삼은 것이며, 이 방법을 부모에게 배우고 허락받은 아이들이다. ‘기죽지 마라, 교사는 그리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는, 교사가 공개적으로 학생을 혼내는 일은 모두 모욕이 된다.

아이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인신공격이 된다.

매뉴얼을 만들 수 없는 방대하고 세세한 교육 활동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천하에 잘못된 일이 된다.


학교는 공적인 공간이다.

공동체 안에서 잘못을 했다면, 공동체 앞에서 책임지고 약속할 줄 알아야 한다. 모욕이 아니다.

잘못을 했다면 마땅히 부끄러워하며, 속상함을 느껴야 한다. 우리 모두 부끄러움을 딛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과정 속에서 성장한다. 

타인은 나를 속속들이 알아주지도, 무조건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인간 관계에서 내 감정만 중요하다고 외쳐서는 안되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리광을 부려서도 안된다.

내가 한 말과 행동이 타인이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그로 인해 혼나는 것은 인신공격이 아니다. 기분 나빠하기에 앞서 자신이 보여준 말과 행동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이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 활동을 교사가 행한 모욕과 인신공격으로 바꾸는 힘을 학부모는 가지고 있다.

 

아이들은 계속 잘못을 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적시에 잘못에 책임지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 한 아이들은 빠르고 교묘하게 잘못을 되풀이하며 몸집을 키운다.

가장 순수하면서도 가장 나쁜 생각을 하는 시기이다. 

다리 다친 새를 보살펴 주면서, 그 새의 알을 한낱 호기심만으로 깨 버릴 수도 있는 때이다.

전자의 모습만 보려 하는 학부모가 힘을 보태 ‘교사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한 순간 학생들은 후자가 된다. 한 반에 두 명만 그렇게 마음 먹더라도 여섯 명이 나선다. 교사는 무너진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교사는 대단한 존재도 완벽한 사람도 아니다. 무조건적인 존경과 우대가 필요 없듯이, 하대하거나 기선제압할 대상으로 볼 필요도 없다. 감시와 의심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폭압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 있는 존재로 보는가.

지금의 교사는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다.

적어도 지금 교단에 서 있는 교사들은 폭력으로 아이들을 교육해서는 안된다는 가치 안에서 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폭력이 용인되는 학교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으나, 그래서는 안된다는 문제 의식으로 교사를 준비했다. 체벌 금지, 공포의 무의미,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학생들과 그것을 보장하는 현재의 방향이 옳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공포의 자리를 밀어내고 수많은 학급 운영 방식을 고민하며, 대화가 교육의 기본값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폭력을 유일한 교육 방법으로 사용했던 노령의 교사들도 결국엔 변화하고 적응해 냈다. (잘못된 방식을 택하는 교사가 있긴 하나, 기사에 날 정도로 드문 사례가 되었고 그런 교사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학부모 민원이 드물다. 학생들이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교육 활동을 해 보려고 발버둥치는 교사들이 주된 고통을 겪는다.)


학생, 학부모, 교사는 공적인 관계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며, 시시각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시기이기에 학부모와 교사는 정보를 공유하고 분석하며, 결국엔 학생을 위한 최적의 길을 찾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대단한 사람은 아니어도 어려운 사람은 되어야 하지 않은가. 

하나의 공동체 앞에서 교육을 할 권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교육은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말하는 권리이며, 완벽한 사람이 아님에도 올바른 길, 이상적인 길을 알려주는 권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 방법이 좀 더 정교해지도록 '업무 경감, 학급 당 인원수 감축' 등 진정 해결이 시급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벽을 쌓고  교육권을 무너뜨리는 건 길이 아니다. 


여기 잘못을 했고, 혼나야 하는 학생이 있다.

지나가는 동네 어른마다 꾸짖는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안된다.

지나가는 교사도 고개를 돌린다. 옆 학교 학생이 잘못해도 눈을 감는다. 

우리 학교 학생이어도 학교 밖이라면 입을 다문다.

이제는 우리 학교 학생이, 학교 안에서 잘못을 해도 혼낼 수 없다. 

그럼 그 학생은 언제, 누가 혼내는가?

모든 기회를 놓친 아이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


교사가 죽으러 학교에 갔다.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자괴감, 외로움이 거기 있었다.

어떤 연유를 갖다 대더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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