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언제나 부끄럽다 #7
내가 뽑혀간 사단 본부대는 훈련소와는 달랐다.
먹는 것이 너무 좋았다. 냄비 같은 식기가 아니라 식판이었다. 거기에다 1식 3찬이었고, 생선뿐만 아니라 더러 육류도 나왔다. 더 좋은 것은 밥이 모자라면 더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취사병들은 특히 신병에게 너그러웠고, 줄을 서지 않고도 PX에서 아맛나를 사 먹을 수도 있었다.
정보를 먼저 알고, 그림으로 글씨를 쓴 꼼수였든 아니든, 어쨌거나 그 많은 인원 가운데 선발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었고 먹는 것에 관한 한,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내무 생활도 만족스러웠다. 여러 부처의 사병들이 모여 한 내무반을 이뤘지만 선임이라 해서 후임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문제는 사무실에서였다. 정보처에서 신병 선발에 걸었던 기대를 나는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일정 기간 동안 사역에 동원되면서 오후에는 글씨 연습의 시간도 주어졌지만, 내 행동은 민첩하지 못했고 글씨도 잘 늘지 않았다. 업무 처리는 물론 너무나 미숙하였다.
사회에서 문서를 처리해 본 적이 없으니, 하는 일마다 허점 투성이였다. 거기에 박 병장이 제대한 전투서열과에는, 사수인 이○○도 이병으로 나보다 한 달 보름 정도 선임이었을 뿐이었다. 일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자신의 일 처리에 급급했다. 나는 한 마디로 고문관이 되었다. 쇠다마 과장 전 대위는 드러내 놓고 아프게 찔러왔다.
"대학 나온 놈이 기안 하나도 제대로 못해? 저런 놈이 어떻게 서울대를 나왔어?"
열심히 해도 나는 대학을, 서울대를 욕 먹일 뿐이었다. 함께 뽑혀 온 서 이병은 잘 적응을 했고, 전투서열과 사수 이○○도 일처리가 깔끔했다. 글씨는 정말 늘지 않았고, 잘 쓰려고 할수록 쓰는 속도만 느려 터졌다. 거기에 비밀취급 인가도 쉽게 나지 않았다. 사역을 나가는 것이 편했다.
자존감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나에게 품위란 없었다. 자기존중은 거리가 멀었다. 스스로에 대한 비하와 부끄러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사단장실과 관련이 생기면서, 대학 졸업자라는 정체를 희미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의 이러한 심리는 선임 황○○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처음 선발되었을 당시부터 미운털이 박혔었다. 그는 나보다 3개월(?)정도 선임으로 마이가리 일병을 달고 있었다. 나의 정보처 생활은 그를 빼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그에게 12~13개월 괴롭힘을 당한 것 같다. 최악의 선임이었다.
눈빛이 선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병 둘을 세워놓고, 나이를 확인하고 난 다음에 출신학교를 물었다.
"사회에서 뭐하다 왔냐?"
"대학 졸업하고 왔습니다."
"무슨 대학교?"
"서울대입니다."
그는 따귀를 올려붙였다.
"니가 서울대 모든 과를 다 나왔냐?"
"서울사대 국어과 나왔습니다."
이것이 그 와의 첫 개인적 만남이었다. 그는 단국대 1학년을 마치고 입대했으며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어렸다. 그는 3개월 선임으로서 3년 선배를 신나게 욕보인 것이다.
그의 옷은 이병의 옷이 아니었다. 군복이 태가 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상병 정도의 짬밥이 필요하다. 그는 차림에 엄청 신경을 썼다. 군화는 항상 반짝였으며, 그의 옷은 잘 다려 줄이 잡혀 있었으며 맞춤복 같았다.
그가 후임을 대할 때는 늘 근엄하거나 미간을 약간 찌푸린 표정이었다. 그리고 어깨에는 항상 힘이 들어가 있었다. 걸음걸이는 흐트러짐이 없고 상급자에게 경례를 할 때는 고개도 함께 숙였다. 그에게는 친구가 없어 보였다. 상급자와 하급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포식자였고 나는 먹이였다.
그를 생각하면 세속오계가 떠오른다. 그는 상급자를 잘 모셨다. 그건 후임에게 자신을 잘 모시라는 뜻을 내포한 듯이 보였다. 그의 태도를 오계를 흉내 내어 말을 만든다면 사상이유(事上以諛: 아첨으로 윗사람을 받들다)라고나 할까? 후임에 대해서는 멸하이억(蔑下以抑: 눌러서 아랫사람을 멸시하다)이었다.
그에게 받은 심리적 모욕과 육체적 괴롭힘은 열거하기 어렵다. 그 중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후임의 임무에 대한 끝없는 잔소리이다. 낮에 실컷 놀다가 저녁 무렵이면 올라와서 일을 시작한다.(그는 차트 담당이었음) 나는 물론 그 옆에서 시중을 들면서 그의 표정 변화를 예민하게 읽어야 했다.
12시 가까이 돼서 술안주로 고추를 따러 후문을 나가는 것은 차라리 괜찮다. 참모실 책상 위에 모포 깔고 누워 제풀에 지쳐 잠이 들 때까지 잔소리하면서 우리를 옆에 세워 두는 것은 그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동기 서 이병이 처리할 일이 있어 사무실로 올라가며 눈짓을 했다. 점호 끝나고 신세타령이나 하자는 것이었다. 뒤미처 따라 올라온 그는 다짜고짜 따귀를 올려붙이고 참모실로 끌고 들어갔다. 무엇 때문인지 잘 모른다. 내무반 무단이탈이 죄명인 것 같았다. 한참 맞고 있을 때 서 이병이 들어왔다. 이런 것이 전우애인가? 고마웠다.
"변 이병이 사무실에 온 건 얘기 좀 하자고 제가 불러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저도 같이 맞겠습니다."
"좋아! 엎드려!"
맞은 매의 대수까지 정확히 기억할 수 있다. 야전 침대 옆에 끼는 막대기(마후라)로 여섯 대씩 맞았다. 얼마 안 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엉덩이가 터졌다. 그는 때리는 재주가 좋았다. 아래로 한 대 위로 한 대 그렇게 때리면, 힘 안들이고 살갗을 찢을 수 있단다. 그 후, 우리는 한동안 주임상사가 구타 점검하는 때면 내무반에 내려가지 못했다. 터진 엉덩이에 팬티가 붙어 옷 갈아입을 때면 고역을 치러야 했었다.
그는 구타의 상당한 이유를 갖고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이유에 수긍하기는 어려웠다. 요즘 학교 현장을 비교한다면 나는 일진 앞에 고개 숙인 찐따(피해자) 모습과 유사했던 것 같다.
상황실에서 전화가 왔다. 황○○이었다.
"화랑, 통신보안 정보처 변 이병입니다."
"......"
얼마 후, 씩씩거리며 그가 뛰어들었다. 그리고 소리 질렀다.
"이 새끼, 전화 제대로 못 받아? 고참 전화를 지가 먼저 끊어?"
욕설에 이어 폭력이 가해졌다. 그가 뛰어 들었을 때 나는 전화기를 그대로 들고 있는 상태였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저 새끼는 제 감정 내키는 대로 괴롭혀도 덤벼들지 못하는 놈이라는 것을. 나는 그의 좋은 먹잇감이었고 감정 쓰레기통이었다. 서 이병은 가끔씩 부당한 폭력에 대해 안 좋은 낯빛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서 이병에 대한 그의 폭력은 어느 정도 선을 지키는 느낌도 들었다. 그는 약한 사람에겐 강했고, 강한 사람에게 약했다.
교련 혜택 3개월을 받아 황○○보다 내가 먼저 제대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나보다 3개월 선임도 아니었다. 제대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황 병장, 그렇게 살지 마소."라는 말을 했다고 서 사장(서 이병)은 얘기하지만, 내 성격으로 보아 모함(?)일 듯싶다. ㅎㅎ
76년에 이상한 바람이 불었다. 사단사령부에 근무하려면 2급 비밀취급 인가가 나야만 한단다. 비밀취급인가증이 없는 병사를 대상으로 신원조회가 이루어졌다. 사수 이○○은 어머니가 6.25때 '여맹'인가 어디에 참여하였단다. 그는 예하대로 쫓겨났다.
내 비밀취급 인가도 나지 않았다. 신원조회를 할 때마다 부적격이었다. 6.25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큰 형님이 부역을 했단다. 나도 사수와 마찬가지겠구나. 연좌제는 갑오경장 때 없어졌는데...
쇠다마 과장은 "저 새끼는 연대로 쫓겨나야 돼"라는 말로 저주했고, 그렇게 되는 것이 예정된 코스였다.
참 우연한 일이 사람의 앞날을 좌우하기도 한다. 나는 비취인가가 났다. 보안과장 이 대위와 전투서열과장 전 대위는 사이가 엄청 나빴다. 그런데 전 대위가 나를 예하대로 보내려 하니, 비취인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보안과장이 비토를 놓은 것이다. 그야말로 어부지리였다. 표면적으로는 두 사람의 알력 때문이라 하지만, 자신 부하 사병에 대한 이 대위의 보호 의지가 작용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참 고마운 분이었다.
최고참 김 병장이 제대할 때 너무나 절망스러웠다. 이제 황○○이 최고참이 될 것이고, 보호막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황○○을 나무라는 일은 거의 없지만 황○○의 행동을 무언 중에 통제했었다. 그의 제대 후 걱정은 현실화되었다.
나는 사단장실로 옮기고 난 다음에도 정보처 선 후임들과 친하게 지낸 편이다. 지금은 홍천에 사는 농군(?) 이○○을 만나면 늘 분노에 차서 그를 비난했다.
제 버릇 개 주겠는가? 그의 후임 괴롭히는 행태는 내가 자리를 옮긴 후에도 계속되었던 모양이다. 이○○의 말이다.
"내무반에서 불침번을 서는 날이면 내가 무서워진다. 황○○이 자는 옆을 지날 때면 개머리판으로 그의 머리를 찧고 심은 충동을 느낀다."라고.
그는 말년이 초라했었다. 내무반에서는 대체로 처부별로 취침 자리가 정해져 있고 후임이 취침 준비를 한다.
이○○이 얘기했다.
"요샌 황○○ 자리도 안 깔아 준다."
같은 내용의 탄식을 황○○에게도 들은 적이 있다. 서사장의 얘기가 재미있다. 몇 해 전 골프 모임 후, 목욕탕에서 황○○을 30여년 만에 우연히 만나 등짝을 '짝' 소리 나게 치면서 말했단다.
"야, 황○○ 오랜만이다."
그는 당황하며 우물쭈물 자리를 피했단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피하거나, 아마도 또 바보처럼 얘기했을 것이다.
"황병장님, 오랜만입니다."라고.
《 훈련소에서 양 하사나 이 하사의 괴롭힘은 재미 삼아 혹은 성질을 못 이긴 일회성이었다. 그러나, 황○○의 폭력은 거의 모든 후임에게 미쳐 광범위했고, 인간의 품성 자체를 의심케하는 지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스탠퍼드 감옥실험을 떠올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선한 인간도 환경과 역할에 따라 악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실험과 황○○의 후임에 대한 폭력은 무언가 닮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그는 입대 4개월 만에 사무실에서 중고참의 위치에 올랐다. 그는 간수 배역의 피실험자가 죄수 배역의 피실험자에게 신체적 폭력과 심리적 모욕을 자행했던 모습을 그대로 보인 것이다.
그를 별종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성악설에 표를 던진 건 섣부른 판단인 듯하다. 그 역시 환경과 역할에 심하게 지배받은 평범하고 나약한 한 인간일 뿐, 짐승은 아니라고 생각해 두자.》
* 그때 정보처 사병들은 지금도 계속 만나고 있다. 황○○은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 스탠퍼드 감옥실험: ‘스탠퍼드 감옥실험’이라는 것이 있다. 1971년 8월에 미국 스탠퍼드대학 심리학과의 필립 짐바르도 교수가 진행했다. 연구팀은 미국과 캐나다 중산층 출신 가운데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24명의 학생을 엄선했다. 그리고 간수와 죄수로 각각 12명씩 배역을 맡겼다. 실험 기간은 2주였으며 실험진행자는 일체 끼어들지 않고 관찰만 했다.
첫날부터 죄수들은 크고 작은 소동을 일으켰다. 간수들은 역할에 따라 이들에게 엄격한 통제를 취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간수 역 학생들이 죄수 역할자들에게 심리적 모욕은 물론 신체적 학대까지 스스럼없이 자행하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사태가 극단으로 치달을 우려가 커지자 실험은 당초 일정보다 크게 단축되어 6일 만에 끝났다. 이 실험은 환경과 주어진 역할에 따라 선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악한 사람으로 돌변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