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언제나 부끄럽다 #5
변소에 낙서된 '세월은 구보로 청춘은 원위치'라는 표어가 마음에 와닿는 말이었다. 국방부 시계는 돌아서 힘든 훈련소 생활도 끝이 났다. 6주가 지난 것이다. 간단한 일조점호와 조식이 끝난 후 우리는 자대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들을 배급받았다. 처음 입대해서 받았던 것들과 달리 모든 것이 새것이었다.
군복 두 벌, 워커와 훈련화, 새 모자와 이병 계급장, 내의, 각종 세면도구 등이었다. 워커와 훈련화는 발에 딱 맞았다. 그러나 군복은 미군들이 입으면 어울릴 크기였다. 상의는 그런대로 입을 만했으나, 하의는 내 허리에 맞추기 위해서는 몇 번 접고 입어야만 했다. 워커가 작아 교체를 요청하는 병사에게 내무반장이 '군인은 발을 신발에 맞추는 거야.'라고 한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점심 식사 후, 배치되는 부대 혹은 보충대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훈병들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대부분 101 혹은 103 보충대였지만 일부는 카투사나 공수부대로 직접 배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새우젓 이병은 카투사로 배정되며 환호작약하였다. 공수부대 줄에 서 있는 친구들은 표정이 밝지 않았다(공수부대는 자원이라는 얘기도 있었음). 서부 전선으로 배치되는, 그래서 서울에 가까운 101보를 원했으나, 나는 역시 운이 없었다. 103 보충대였다.
배출되기 직전에 훈련소 생활의 만족도, 개선점, 억울한 일 등에 대해 느낀 바를 적어내는 소원수리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요식 행위일 뿐이었다. 기간병들이 '잘못 적어내면 훈련소를 나가기도 전에 죽는다'고 사전 교육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들의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가혹 행위를 고발하기에는 나는 너무 겁을 먹고 있었다.
배치 부대별로 훈련소를 나서는 시간이 달랐다. 열차 시간표 때문인지 103 보충대인 우리는 오후 일곱 시가 넘어서 부대를 나섰다. 5월 중순이라 해는 아직 남아 있는데, 훈련소 밖은 인산인해였다. 그들은 훈련병들이 오늘 배출된다는 것을 알고 모여든 것 같았다. 특히 여자들이 많았다.
우리는 4열 종대 큰 걸음으로 행군을 하였고, 좌우에는 이탈자를 막기 위해 여러 명의 기간병들이 따라붙었다. 여기저기에서 아들을 부르는 소리, 애인을 찾는 외침이 들리고 이에 호응하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며 행군 열은 삽시간에 흐트러졌다.
보퉁이를 든 여인들이 열 가운데로 난입하였다. 아마도 자식, 애인, 동생에게 먹거리, 금전 등을 전해주기 위해서이리라. 그것을 건네받기 위해 병사들이 열을 이탈하면서, 그냥 방치하기에는 혼란의 정도가 너무 커지게 되었다.
우리는 행군을 잠시 중단하고 다시 정렬을 해야 했다. 인솔 책임자가 일장 훈시를 하고 안동역까지 구보로 행군할 것을 명령했다.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뛰어 갓!” 구령에 맞추어 우리가 막 움직이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아까부터
엄마가 나왔을 텐데..
라고 중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 옆의 대호라는 병사가 갑자기 “엄마!” 소리를 질렀다. 우리의 행렬 옆에서 같이 뛰던 한 아주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모습이 50은 넘어 보였다. '엄마'라고 외치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아들을 찾은 것이다. “대호야!”하며 접근했으나 기간병에게 제지당했고 젊은이의 구보 속도는 아들과 어머니 사이를 점점 멀어지게 했다.
엄마~!
대호야~!
주고받는 소리가 몇 번 더 안타깝게 이어졌지만 엄마와 아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아주머니가 우리 행렬 저 뒤편으로 떨어지자, 대호가 군복 소매로 눈을 훔치며 소리 질렀다.
“엄마~ 오지마. 오지 마라니까!”
그렇게 그 아주머니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호는 안동이 고향인 친구였다. 나보다 세 살이 적었다. 나이 많다고 나에게 형 대접을 해 주던 좀 여린 친구였다. 한 달반 동안 같은 내무반에서 고락을 함께 했던 친구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안동역까지는 그리 멀지는 않았나 보다. 십여 분 뛰었을까? 우리는 플랫폼에서 열을 맞추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병사들이 아까 건네받은 보자기에서 먹거리들을 꺼내어 나누어 먹으며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로 통닭류였다.
우리가 도착하고 한 5분쯤 지났을까? 플랫폼에
"대호야!"
를 외치며 한 아주머니가 헉헉거리며 뛰어들었다. 인솔 기간병에게 사정을 얘기하며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대호의 손이 자꾸만 얼굴에 오르내렸다.
돌아온 대호의 손에는 통닭 두 마리가 든 봉지가 들려 있었다. 아들에게 이것을 먹이기 위해 대호의 어머니는 훈련소에서 안동역까지 구보를 한 것이었다. 치마저고리를 입고서. 대단한 어머니였다. 아니, 어머니는 모두 대단하시다.
ㅁ후기
안동역에서 밤 열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한 것은 새벽녘이었다. 춘천으로 가는 차편을 기다리며 나는 쪽지를 적어 길가는 행인에게 주었다. 둘째 형님에게 연락해 줄 것을 부탁한 것이었다. 팥빵을 사 먹을 돈이 필요했었다.
청량리에 가까운 석관동에 사시던 형님이 춘천행 열차 출발 전에 오셨다. 목책을 사이에 두고 인사를 하는 내게 형님의 첫마디가 "살이 많이 쪘구나. 부은 거니?“였다.
형님은 내게 담배 한 보루와 돈 2만 원을 전해 주셨고, 그것은 나에게 그야말로 생명수였다. 이젠 돈 걱정 없이 빵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주머니가 든든한 103 보충대에서 3일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 대호 어머니의 구보는 숭고하면서 슬픕니다. 자식의 배를 채우려는 달음박질은 차라리 성스러웠습니다. 통닭 전해 주며 자식 얼굴 어루만지던 그 손끝엔 안도와 걱정이 배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어메 생각이 저절로 났습니다.
엿 고던 날 가마솥 옆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리다 기다리다 잠이 들었는데, 달콤한 맛을 느끼고 쩝쩝거리다가 눈을 떴습니다. 어메가 엿을 다 고으셨나 봅니다. 엿에 콩가루를 묻히시다가 다시 조금 떼어 내 입에 넣어 주셨던 그 엿 맛이 아직까지도 남아 그립습니다.
그 달콤함이 어메의 사랑의 맛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자식을 앞세우시고 애끊는 아픔 속에서도 어디에 또 사랑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요?
자식의 똑똑하고 어리석음이 어머니 사랑의 기준이 아닌 건 정말 다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