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르게이홍 Nov 03. 2024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

시가, 그 시가스러움에 대하여

이혼소송에서 나는 어려서 부모떨어져 외국생활을 해서 보고 배운것도 없고 돈만 많은 무식한 집안에서 자란 도른자가 따로 없었다. (다시밝히지만 돈 없다..)


돌아가신 할머니사진까지 소장에 올리면서 집안모욕을 했다. 이혼 소송은 그렇다. 되는 소리없는 소리 100개의 공을 던져 그 중 3ㅡ4개 맞으면 빙고다.


쌍방간에 그리해도 모자란데 한쪽이 기각입장이라면 그냥 싹다 버텨야한다. 악소리 하는 순간 재판부는 "응 너 오기와 보복적 감정." 하며 이혼시켜버리기때문이다.


억대 (천억 백억 아니고.. 3.5억...) 재산분할을 놓고 시가 식구들은 모두 대동단결해서 미친듯이 진술서 융단폭격을 했다.

결혼중 단1번만난 시누는 언제부터 나를 잘알았을까? 둘째는 본적도 없는 시부시모는 나와 개새의 생활을 어떻게알까?


우리는 못삽니다. 우리는 돈이없습니다. 저년이 x년입니다. 우리아들은 불쌍합니다.....

혹자는 그 진술서를 보고 90년대쯤 지하철에서 나눠주던 "저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 의 현대판이라 했다ㅋㅋ


시가가 없다 싶이 살아왔다. 없으니만 못 했다.

꼭 마지막 저 지경을 보지않았어도 시가는 언제나 돈줘. 돈보내. 돈대신갚아 였다.. 울아덜 너나이 또래 아직 결혼 안한 사람도 많아. 너 정도면 더 좋은 사람만날 수 있어 (응ㅋ 둘째까지 낳은뒤의 시모카톡이다)


둘째를 낳기 전 한번 유산했다.

임신사실을 알고 바로 시모한테 알린 모지리의 카톡엔 축하대신 시모의질책만 가득했다


너 힘들게 왜 굳이

첫애도 아들인데 뭐하러 또

걔는 왜 애를 더.. 


그날  왜 임신초기인데 시모에게 미리알렸냐로 시작된 싸움은 해가 떠오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3일뒤 유산했다.

기독교에서 원죄가 있다면 걔와 나 사이의 원죄는 늘 시모였다.


여자에 미쳐 집을 떠난 아들을 혼내고 집으로 돌려보내긴 커녕 차명으로 집을 얻어주겠다, 이참에 새롭게 시작해라 라는 얘기를 하던 사람들..


그렇게 난 없느니만 못 한 시가가 있었다.

이혼을 하고 아빠없이 아이들이 자라는 일은 더없이 안타깝지만 저런 사람들과 법적으로 끊어진것은 다행이다.

난 분명 바디워시를 샀는데 수요없는 공급으로 따라온 썩은 샴푸, 린스, 트리트먼트는 끝내 내가 산 바디워시까지 다 썩게했다.


내가 대가족에서 컸고 우리 할아버지가 세 자식을 다 델고 살았기에 나는 늘 삼촌 숙모 사촌들과 북적였었다. 내 아이들도 어른과 지내며 예의를 알고 이전세대로 부터의 무한한 지지와 사랑을 계승받길 바랐다.


요즘같은 때 아파트서 이웃과 자유롭게 왕래하는게 흔하지 않겠지만 1001호에 사는 나는 1002호

901호 902 호 (호수는 맘대로 바꿔서 씀을 밝혀용)  어르신들과 오래도록 오가며 지냈다.

단지내 유일하게 단독라인인 우리동엔 1호와 2호뿐이었다.


이사들어오고 며칠뒤 100일을 맞은 큰아이를 데리고 예전 우리집 어른들이 하시듯 이웃에 인사를 다녔다.

(전놈은이런걸 본적도 배운적도 없어 오바떨지말랬지만 호도과자 21박스를 사서 돌아다녔다)


21세대뿐인데 우리가 제일 젊었다.

이런 갓난쟁이는 손주뻘도 안되는 어른들

아직 손주볼 나이는 안된 20대 아이들을 두신 분들

첫째를 환영해주시고 10년간 사랑해주셨다


그중 앞집에 계시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 할머니보다 나이가 많으셨지만 일본.미국에서 오래사시다 오신분들로 이미 손주들이 내나이 정도에 다 미국에 있어 우리 아이들을 아껴주셨다.


901호 할머니가 홀로 돌아가시고 얼마지 않아

1002호 할머니할아버지도 이사를 가기로 하셨다고 우리집어 인사를 오셨다.

모든 짐들은 기부하고 간소한 짐을 가지고 풀퍼니쳐 오피스텔로 가신댔다. 정리되면 그 다음주에 집들이를 하기로 했는데 그만 석달이 넘어서야 어제 만나뵈러갔다.


95살의 할머니는 이사하기 전 길에서 삐끗하셨는데 두달간 입원하고 두번의 수술을 하셨댔다. 그 시간 동안 기억도 많이 잃으시고 함께 지내기로 하신집엔 할아버지 혼자셨다. 퇴원하고 집에 오셨다가 이내 요양병원으로 가셨다.


어제 아이들과 할아버지만 계신집에 갔다.

아이 둘이 각자 고른 꽃다발과 카스테라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 동안 쇼핑몰 다니시며 아이들 선물을 많이 사두셨다. 가벼운 손으로 갔다가 셋이서 양손에 쇼핑백을 잔뜩 들고 돌아왔다



핏줄도 못알아보는 "것" 들이 있는가 하면 일말의 혈연도 없는데 마음으로 아이들을 진짜 사랑해주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했다.


끝이 나서 다행이라는 연도 있고, 몇년이라도 오래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연도 있는것도 아이러니한 하루였다.





  + 이사하신집이 너무 좋아서 내 마음이 더 행복했다.

작가의 이전글 H²O 의 주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