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교장 선생님은 공모 교장으로 오셨다. 아주 의욕적이셨다. 예의 공모 교장선생님들이 그러하듯. 학교를 혁신하고(이전은 문제가 있다는 전제 하에) 교원의 의식을 개혁하여 학생들이 오고싶은 학교, 학부모가 보내고 싶은 학교로 만들고 싶어하셨다. 많은 부분들이 동의가 되지 않았다. 이유들은 여럿이었으나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한가지는 그 학교라는 단어 안에 교원(사)가 빠졌다는 점 때문이었다. 교사도 행복한 학교를 왜 빼는 것일까 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교사의 행복은 곧 학생과 학부모의 행복에서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즉 전체 파이안에서 교사의 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상대의 파이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근저에는 교사의 지분안에는 '교사는 뭘 더 하기 싫어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했다. 특강도 하고, 수능 입시를 위한 강의도 개설하고, 진학 상담도 많이많이 해주고, 아침 맞이도 일찍부터 나와서 하고 밤늦은 보충수업까지.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무엇이든 교사의 희생에 가까운 추가적인 노동이 전제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를 좋아했다. 학생들이 좋았고 수업은 재미가 있었다. 학생들의 톡톡 튀는 생생한 민낯의 아이디어들이 좋았다. 그것은 오로지 수업에 들어간 나만 맛볼 수 있는 달콤함이었다. 돌아보면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들인지도 모르고 취해 있었다. 그 시절이 좋았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도 학생들은 사탐수업을 들으러 왔다. 달도 별도 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 밤에 고3의 입시 고개를 넘어가는 학생들은 지치지도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도 젊었다. 우리는 킬러 문항 분석은 젖혀두고 서로 웃고 떠들었다. 학생들은 '선생님은 학원 1타 강사같다'며 치켜세웠다. 한껏 고무된 나는 '부산 사투리쓰는 일타강사로 전직해볼까' 라고 응수하며 열심이었다. (그 학생들은 1등급 받으려고 왔었는데... 결국 받은 등급은...쩝!)
교사는 그런 사람이다. 월급 몇 푼 더주지 않아도 그저 아이들로부터 받는 에너지가 월급보다 더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교단에 서보면 아이들이 얼마나 이쁜지 알 수 있다.) 내게 주어진 교단 위에서 말하나 행동하나 허투루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내가 한 말은 다시 화살이 되어 내게 돌아올것이기 때문이다. 애들은 나의 일장 연설뒤에 꼭 이렇게 되물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요?" 대충 얼렁뚱땅 얼버무릴 수 없는 양심의 날카로운 회초리같은 눈빛들이 늘 나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학생들 앞에 당당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선생님은 만들어진다. 태어날 때부터 선생님은 없다. 타고난 사람도 없다. 그저 교단에 서는 그 때부터 그저 조금 더 바르고 부지런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서 교사의 행복도 중요한 것이다. 교사에게 돌아오는 사회의 존경심과 신뢰는 꼭 필요하다. 그래야만 교사는 교단에 설 수 있다. 믿지도 못하는 교사에게 교육 '서비스'를 받고 밥만 먹으면 된다고 보내는 급식학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다함께 행복한 학교를 다시 만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