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뱉어내야 마음, 생각이 정리되는 편이라 뭔가 엉켜있어 꼼짝하지 못할 때 혼자 노트북을 열어 봅니다. 어떤 말도 머물러있지 않은 멍한 상태라도 키보드 자판에 양손 검지를 자음 리을과 모음 어에 각각 올려놓고 심호흡을 하면 막힌 둑에 작은 틈새하나 생기 듯 속의 말이 흘러나옵니다.
5월 초 열흘간의 미국여행으로 제 오만을 만나고 와서는 그마저도 안돼, 잠시 멈춰 서 있었습니다. 언니 딸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려고 언니와 함께 떠난 여행입니다.
3살 터울의 괄괄한 언니는 명랑하고 애교도 있어 사회성이 좋은 편인데 울보입니다. 어려서 큰소리만 들어도, 서운하다는 소리를 할 때도 여지없이 눈물부터 흘립니다. 지금도 말하면서 자주 찔끔거리는 언니를 챙겨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힘에 부친 상대에게 맞으면 돌멩이라도 던지고 달렸던 터라 매사 조용하지만 제가 강단이 있다 여겼을까요?
그보다는 가난한 집 맏딸에게 강요되던 양보와 희생을 고스란히 겪은 언니에 대한 미안함이 컸을 겁니다. 초등 2학년때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저와 연년으로 학교를 다녔는데도 엄마가 했음직한 바람막이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또 나중에 알았지만 뒤이어 대학에 입학할 동생을 생각해서 대학에 붙고도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더군요.
그런 미안함에 언니의 뜻을 거스른 적은 없는 듯합니다. 물론 언니가 허당인 데가 있어 챙겨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런데 뉴욕 한복판, 야경을 구경하러 나선 자리에서 인형탈을 뒤집어쓴 외국인 남성 다섯에게 둘러싸이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중 한 명의 손에 제 휴대폰이 들려있어 팔을 번쩍 올려도 닿지 않으니 난감했습니다. 처음에 사진을 찍자 해서 워낙 번쩍번쩍한 곳이라 이런 부류도 있는가 싶고 재미도 있어 언니와 제가 번갈아 가며 인형탈을 쓴이와 사진을 찍었는데 순간 네 명의 인형탈들이 달려들더니 언니와 저를 함께 찍어주겠다면서 순식간에 폰을 가져가고 웬 탈이 이리 많은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찍고 보니 20달러를 달랍니다. 지불하지 않으면 폰을 주지 않겠다는 심산입니다. 여행 마지막밤이라 이제 호텔 가서 자고 공항으로 가는 일정만 남은 터, 수중에 1달러도 없는데 말입니다.
얼굴이 달아올라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언니가 지갑을 열었습니다. 그 안에 달러가 훤히 보이는데 1달러를 꺼냅니다. 그들이 더 달라고 버티자 언니는 1달러를 더 내주며 이제 없어라고 단호히 말했고, 그 기세를 타서 저는 폰을 잽싸게 챙겨 왔습니다. 지갑에 든 달러를 봤고 제 폰을 가졌으니 그들이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어땠을까 아찔해집니다.
언니에게 이것도 주고 저것도 줬는데 돌아오는 건 하나 없다며 간간히 서운했던 마음이 싹 가시고 그동안 언니에게 준 것이 아니라 크게 받고 조금씩 갚고 있구나 싶습니다. 그나마 언니에게 퍼줘도 축나지 않을 곳간을 가지고 있는 건 클 때 언니가 양보했기에 가능했을 것이고 지금도 여전히 언니가 저를 챙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오만했습니다. 갚아나가면서 준다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