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에 하고픈 일만 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 시간들을 오래 소망했습니다.
출근할라치면 대문까지 쫓아 나와 아쉬워하는 반려견들과 하루 종일 뒹굴거리며 해넘이를 보리라. 바람 산들하고 해가 화사하게 쨍한 날에는 반려견들과 마당에서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으리라. 반려견 산책을 여유 있게 하리라.
안 돌아가는 머리 굴리느라 골치 아팠으니 머리는 그만 쓰고 몸 푸는 일에 시간을 쏟으리라.
집과 직장을 오가는 쳇바퀴에서 벗어나 멀리 여행도 가고 지인들과 잡다한 수다를 떠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으리라.
직장생활 33년간 지향하던 가치를 되돌아보고 자본주의에 무작정 순응하지 않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초석으로 인문학 공부를 하리라. 배움을 멈출 수는 없으니.
또 그동안 받은 것을 갚는다는 의미로 작은 봉사라도 실천하리라.
막상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은 없지만 호기심이 생기는 순간 주저 없이 자리 털고 일어나 시작해 보리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심신이 불편한 엄마를 돌보는데 시간을 쓰리라.
해서 시작한 수영이 3년째 접어듭니다. 사실 은퇴 직후에는 무릎 관절이 신통치 않아 걷기도 힘든 시간을 3개월 보내고서야 수영을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수영이 무릎 재활에 도움이 돼서 이제는 필라테스까지 넘보고 있습니다.
먼 거리 여행도 두어 번 하고 친구와 매주 만나 김포, 일산 일대의 들과 산을 도시락 싸들고 쏘다니고, 함께성장인문학연구원에서 문우들과 매주 인문학 책을 읽고 또, 글로 표현하며 진정 나답게 살기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가끔은 독거노인 반찬봉사와 유기견 봉사도 했습니다. 엄마 돌봄과 반려견들과 함께하는 생활은 두말할 것 없이 평화롭고요.
일주일에 1회 정도는 평생교육원에서 하는 강의도 수강하고, 뜬금없이 드럼이 배우고 싶어 한동안 드럼에 몰두하기도 했지요.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이런 건가 할 정도로 하루가 짧으니 은퇴 후 심심해서 일거리를 알아본다는 지인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알듯도 한데, 이 바쁜 하루 일과가 그때그때 기분으로 행하는 것들이니 언제든 기분 내키는 대로 건너뛸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좋아하는 것들로만 계획 돼 있기에 그것이 하기 싫을 때 오히려 더 공허해지고 그 자리를 불안이 채우더군요. 좋음과 싫음의 극과 극을 오가니 마음의 출렁거림이 큰 게죠.
내키지 않더라도 의무 지어진 일을 하다 보면 그 일의 에너지에 힘입어 내키게 되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기도 하는지라, 좋고 싫음의 중간지점으로 말입니다.
일정 부분 의무를 감당하는 시간이 오히려 불안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지주대가 될 수 있음을 은퇴 3년 만에 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