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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의 시간에서 멀어지기

땡감으로, 봉선화로 손수건 물들이기

by 아생


양파로 염색한 손수건을 친구에게 선물로 받았습니다. 양파껍질로 이렇게 자연스러운 노란색이 나왔다는 게 신기해서 저도 시도해봤지요. 소창 2마를 주문해서 손수건과 행주용으로 잘라 새발뜨기로 둘러서 여러 장 만들어 쓰고 있는데 밋밋하니 심심하다 싶었으니까요. 마침 감나무 아래 떨어진 땡감이 있어 검색해 보니 감즙으로 천을 조물조물해서 햇빛에 말리기만 하면 된다 하고, 풋감의 타닌성분이 방충과 항균에 효과가 있다 하니 일석이조입니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아 땡감 예닐곱 개를 모아서, 깨끗이 씻어 믹서기에 갈아놓고, 면포에 담아 감물만 짜내야 하는데 양이 적기도 하고 손목이 비틀리니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다시 검색해 보니 전통방식은 거칠게 으깬 감으로 염색 후 천에 뭍은 감 찌꺼기를 털어냈다기에 행주, 손수건, 누레진 흰 면티를 믹서로 갈아 걸쭉해진 감즙에 20여분 거품이 나게 주물럭거려 햇빛에 널어놓았습니다.


사실, 이런 놀이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3년 전, 은퇴한 해에 뜬금없이 고추장을 담가보리라 해서 항아리부터 구입하고 검색으로 재료 하나하나를 체크해 가며 담근 것을 지금도 먹고 있습니다. 맛이라 할 건 없지만 짠맛으로도 깔끔하니 괜찮습니다.


또 막걸리도 두어 번 담갔습니다. 밥을 고슬고슬하게 해서 엿기름 물을 내어 섞어두고 항아리에 담아 이불로 여러 겹 둘러싸 보온을 유지합니다. 매일 저어주어야 하는데 열 때마다 발효되는 소리가 얼마나 근사한지 아직도 그 소리를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정철이 지은 청산별곡에서 술이 익어갈 때 매운 냄새가 난다더니 한 달 만에 방안에 매운 내가 가득합니다. 드디어 먹어도 되는 시간. 그런데 뽀얀 막걸리를 벌컥 들이켜고는 실망했습니다. 신맛이 너무 강해서 상했나 싶었으니까요. 설탕을 꽤나 많이 때려 붓고야 막걸리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직접 만들어 먹었던 막걸리가 뒷맛이 깔끔하니 기억에 남습니다.


고추장도 막걸리도 시간을 요하는 음식이라 예전 같으면 사 먹고 말지 그 시간과 노고를 어떻게 투자하냐 했던 적이 있었죠.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그리고 결과만을 따지던 습관이 고스란히 묻어있던 말일테지요.


그런 시간들로부터 멀어지려 합니다. 결과야 어찌 됐든 되어가는 과정 한 단계 한 단계에서 멈춰 바라보고 여유 있게 즐기고 싶습니다.


감물 염색은 어찌 됐냐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톡톡한 갈색이 아니고 곳곳이 거무튀튀합니다. 감 찌꺼기는 여러 번 빨고 털어도 잔여물이 남아있습니다. 으깬 감과 믹서기에 갈아놓은 감의 차이인 게죠. 전통방식으로 으깬 감은 툭툭 털면 됐을 테지만 믹서기에 곱게 갈아놨으니 촘촘히 배어든 겁니다.


잔여물이야 시간 지나면 떨어지겠지만 거무튀튀한 건 어쩌나 싶은 중에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봉선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강아지 산책길에 봉선화를 한 움큼 따다가 믹서기에 갈아서 이번에는 손목에 힘을 덜 주고 조심조심 면포에 짰습니다.

명반을 섞어 다시 조물조물 손톱에 물들이듯 하룻밤을 담가두었습니다.

이른 아침, 햇빛이 쨍하게 들어오는 테라스에 한 장 한 장 널어놓으니 바람에 살랑거립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색감은 이도저도 아닌.


그래도 톡톡해진 손수건에서 풋감 냄새가 나니 사용할 때마다 싱그럽습니다.

고추장과 막걸리를 담가본 후에 ‘나’만의 고추장과 막걸리가 생긴 것처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공들인 장미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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