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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율 Mar 27. 2022

[잡담] 취미 기록에 노션 활용하기

뮤지컬을 그렇게 많이 보는 편은 아니다. 찐덕후들 기준으로 그렇게 많이 보는 편이 아니라는 뜻. 얼마 전 예능 프로 <국민영수증>에서 뮤지컬 덕후편을 방송했다. 몇 명의 지인이 나에게 방송화면 캡쳐를 보냈다. 그 의뢰인은 한 달에 20회가량의 뮤지컬을 보는 찐덕후, 난 그냥 덕후다. 일단 그 의뢰인보다 내 월급이 적다. 빚내서 공연을 볼 수는 없으니까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예매한다. 벌이가 두세배쯤 늘어나면 예매를 더 많이 할까. 아무래도 아닐 것 같다. 이틀 연속 공연을 본 적이 몇 번 있는데, 기 빨림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는 건지 다음날의 기 까지 쏙 빨려 하루 종일 시체처럼 걸어 다녔다.


본격 취미로서의 연뮤덕이 된 지 만으로 4년이 됐다. 아주 예전 수능 치고 연극을 몇 개 보긴 했지만 제대로 기억이 안 나니 이는 제외한다. 이제까지 연극, 뮤지컬, 콘서트, 클래식 공연을 포함해 86회 공연을 관람했다. 올해 100회 채울 것 같다. 보관 티켓이 50개가 넘어가던 날, 내가 본 공연 기록을 제대로 남겨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기록하는 내용은 리뷰가 아니고 정보다.




기록 툴로 노션을 선택했다. 한국에 상륙한 요 신박한 툴을 한창 탐구하던 때였다. 공연 기록 아카이브 페이지를 만드는 건 노션 탐구를 위한 좋은 예제였다. 노션은 다방면에 활용할 수 있지만 아카이빙 도구로 특히 탁월하다. 깔끔한 디자인은 물론이고 데이터베이스 입력 시 꽤나 디테일하게 필터와 정렬을 조작할 수 있다. 쉬운 조작으로 멋들어진 페이지를 만들어내는 재미가 있다. 나는 이제 어디 가서 노션 쫌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업무 목적으로 노션을 활용할 때보다 공연 아카이브 페이지를 만들며 훨씬 빠르게 노션을 익혔다. 좋아해야 빨리 는다는 말이 사실이다.


모아둔 티켓을 한 장씩 넘기며 어떤 공연을 봤었는지 확인한다. 구체적인 공연 정보는 인터넷에서 다시 찾아 노션에 입력한다. 하나씩 입력할 때마다 공연을 보던 순간을 곱씹는다. 이건 진짜 여러 번 봐야 할 명작이지. 아 이건 돈이 너무 아까웠다. 내가 이 표를 구하다니, 역시 금손인가. 티켓이 다 넘어가고 관람한 모든 공연을 모두 입력했다. 내 소중한 돈과 시간으로 만들어진 취미 생활이 한눈에 보인다. 한 가지를 꽤나 진득이 좋아하고 있는 나 자신, 기특하다.




노션은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여러 가지 보기 방식으로 나열할 수 있다. 표, 보드, 타임라인, 캘린더, 리스트, 갤러리 6개의 보기 방식이 있다. 페이지가 하나의 카드로 만들어져 전체를 훑어보기 좋은 '갤러리 보기' 모드가 내 노션 페이지의 메인화면이다. '갤러리 보기' 모드는 공연 장르에 따라 구분했다. '표 보기' 모드는 상세 내용을 선택적으로 확인하기 편하다. 배우진이나 제작진에 대한 상세 정보를 '표 보기' 모드를 통해 살펴보곤 한다. 데이터 계산값도 볼 수 있다.


상세 페이지 속에는 수많은 정보가 입력돼 있지만 카드에서는 중요한 정보만 보이도록 설정했다. 썸네일 이미지는 가장 인상적이어던 배우나 무대 장면을 찾아 등록한다. 이미지를 저장해서 등록하지 않고 이미지 주소만 복붙 하면 돼 편리하다. 단지 그 이미지 주소가 사라지면 내가 등록한 이미지도 종종 백지가 된다. 또 제목 앞 이모지를 설정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는데, 해당 공연을 표현할 시그니처 이모지를 잘 찾아냈을 때 뿌듯하다. '같은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분명 이 이모지에 공감할 거야' 하며.




피규어 수집가들은 집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피규어를 전시한다. 뮤지컬, 연극, 콘서트, 2-3시간 남짓의 시간이 지나면 휘발되고야 마는 이 취미를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피규어처럼 어딘가 전시하고 싶었다.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카드가 ‘참 보시기 좋았더라’ 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거 생각보다 유용하다. 소소하게 유용하다.


인생 뮤지컬을 찾으십니까?

내 취미를 딱히 숨기고 사는 편이 아니라 주변에서 뮤지컬에 대해 나에게 묻곤 한다. 마침 나는 이야기하길 좋아한다. 한 명이라도 더 뮤지컬에 입문하게 만들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내 주접에 공감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열심히 추천한다. 누군가 "뮤지컬은 좀 어려워서..."라고 말하면, 아카이브 페이지에서 #코믹 #드라마 등의 장르를 검색해 가벼운 뮤지컬을 추천해 준다. 누군가 "조승우가 그렇게 잘하나요? 저도 조승우 공연은 꼭 보고 싶은데..." 하면 #조승우를 검색한다. 음음.. 입문자에겐 스위니토드보단 대중적인 게 좋겠지. <지킬 앤 하이드>나 <헤드윅>을 꼭 한 번 보세요. 조승우의 매력을 알게 됩니다. (당신이 표를 구한다면 말이죠.) 누군가 "뮤지컬 보고 싶은데 너무 비싸잖아요."한다. #중극장 #소극장을 검색해 그중에 할인 이벤트 많은 제작사의 공연을 추천한다. 그런데 사실 추천해도 사람들은 뮤지컬을 쉽게 예매하지 않는다. 그러려니 한다. 나도 남들이 추천하는 모든 걸 경험 해보려 하지는 않으니까. 그저 이야기 나눠 주심에 감사합니다. 제 즐거움에 대해 말할 기회를 주셨어요.


내 취향을 정확히 아는 당신, 누구야.

기술이 발전하며 영상을 활용하는 뮤지컬이 많아졌다. 나는 특히 <헤드윅>의 영상 디자인을 좋아한다. <헤드윅>에서는 인물 간 상황을 보여주기보다 이야기로 들려준다. 헤드윅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헤드윅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이해시킬 때 영상 디자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 영상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영상을 이용해 배경  전환한다. 영상을 너무 많이 활용하면 간혹 무대가 성의 없어 보이기도 하고 인물과 배경이 동떨어져 보이기도 하는데 <그리스>에서의 영상디자인은 <그리스> 특유의 젊고 통통 튀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두 작품은 영상 디자인 보는 재미로라도 재관람할 수 있을 정도다. 두 작품의 영상 디자이너는 같다. 정보를 모으다 보면 내 취향의 의상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누군지, 내 취향의 조명 연출을 하는 디자이너가 누군지 알게 된다. 배우만 보고 예매했던 난데, 이제 디자이너 취향도 생겼다. 뮤지컬 보는 재미가 더 풍성해진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아 저 목소리 어디서 들어봤는데? 궁금할 때가 있다. 그럴 땐 내가 본 적이 있는 배우인지 아카이브 페이지에서 검색해 본다. 다른 작품에서 본 적 있는 배우인데 역할이 전혀 달라 못 알아보기도 한다. 작품마다 다른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의 실력에 감탄한다. 배우에 대한 신뢰가 생긴다. 다음번에 다른 작품에서 캐스팅된다면 그 작품도 볼 수밖에 없다. 다른 작품에서 앙상블이었던 배우가 이번 작품에서 특별한 배역을 맡은 경우도 있다. 저 배역을 맡기 위해 배우가 어떤 노력을 했을지 상상해본다. 내가 이제까지 무대 위에서 만난 배우는 앙상블 배우까지 포함해 700명이 넘는다. 전부다 무대에서 없어선 안될 사람들인데 내가 기억하는 건 주연배우 몇 명 정도. 모든 배우를 다 기억할 수 없지만 기록할 수는 있다. 기록해두면 기억해내는 게 많아진다. 기억하면 응원하는 배우가 많아진다. 성장하는 배우를 보는 건 즐겁다.



관람 공연 누적 100회를 채우는 날에 아카이브 페이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데이터를 집계해봐야겠다. 인포그래픽 만들어도 재미있겠다. 실력 있는 배우, 신선한 스토리, 탄탄한 제작진. 열심히 살펴보고 100회를 채울 공연을 신중하게 선택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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