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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 노을 Aug 13. 2022

#1

상념과 사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혼자 있을 때나 친구와 얘기를 나눌 때, 간혹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인생의 의미를 묻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인생에 초점을 맞춘다. 

인생의 의미를 묻는 자는, 필연적으로 그런 것이 없음을 안다. 자신의 수많은 사고실험이 그것을 방증한다. 의미 없는 삶의 연속, 그것이 인생이라는 답은 자명하다. 

인생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간단하다. 삶이 힘들기 때문이다. 삶은 의미 없는 삶의 연속이다. 의미 없는 무언가를 놓을 수 없는 아무개의 고행은 시시포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산 정상까지 바위를 굴린 뒤에, 그곳에서 바위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그리고 또다시 바위를 정상까지 굴린 뒤에, 그곳에서 바위가 자신이 처음에 바위를 굴리기 시작한 곳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그런 삶의 연속을 살아가는 시시포스는, 죽음을 거부한 죄의 형벌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시시포스의 고행이 우리네 그것과 유사하다면, 그의 죄 역시 우리의 그것과 유사할 것이다. 

죽음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 우리네 삶이 아닌가. 

우리는 죽음을 피하려고 끊임없이 열심히 살아간다. 


잠깐, 죽음은 무엇인가? 

생물학적 죽음은 신체 기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대로’는 특정 시점보다도 한 개체 안에 축적된 것을 지시한다. 즉, 신체 기관이 시간에 걸쳐 작동하지 못할 때, 누군가, 혹은 아무개는 죽는다. 

사회학적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을 전제로 한다. 에밀 뒤르켐, 피에르 부르디외, 앙리 베르그송, 질 들뢰즈, 프리드리히 니체, 르네 데카르트, 칼 마르크스, 공자, 정약용, 히틀러 등의 동서양 고인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죽었다. 하지만, 사회학적으로는 죽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들의 루머가 형성되고, 학문이 전파되고, 계승자가 생긴다. 1457년 프랑스에서 똥을 밟고 뒤로 자빠져 뇌진탕으로 사망한 마리는 사회학적으로 죽었다.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않으니까. 이 발화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함을 기억하는 것이므로, 그녀 자체에 대한 기억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그녀는 완전히 죽었다. 

우리가 피하려는 것은 생물학적 죽음인가 사회학적 죽음인가?

생물학적 죽음을 피하고자 부자들은 냉동 인간이 된다거나, 노화를 막기 위해 활성산소를 제거하거나 그 이상의 것을 행한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는다. 

결국, 우리가 피하려고 하는 것은 사회학적 죽음이다. 사회에서 잊히지 않기 위해, 과거를 산 누군가는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지 않는 것이 불효였던가. 

현재를 사는 누군가는 자신을 최대한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인스타그램이라든가, 페이스북이라든가, 유튜브라든가 SNS의 영향력은 자신이 죽어서도 살아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위안을 심어준다. 혹은 책을 내기 위해 노력하거나, 유명해지기 위해 노력하거나 등의 방법을 찾아낸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잊힌다. 그들이 유명해져봤자, 그들이 별세했다는 기사가 메인을 장식하고 나서 그들은 잊힌다. 

우리는 결국 잊힌다.      


망각은 에빙하우스식의 반(反)기억 장애물이 아니다. 기억이 반(反)망각적인 것이다. 망각은 참이다. 망각은 진리이다. 삶은 망각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탯줄로 부여받은 은혜 따윈 모른다. 삶은 망각으로 끝난다. 우리는, 우리가 누렸던 많은 행복과 찬란함을 기억하지 못하고 죽는다. 죽기 직전 느끼는 단말마, 그것만이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죽음으로 완성되는 완전한 죽음은 좋은 것인가? 아니, 좋음과 나쁨은 그것의 속성을 나타내는 데 적합한 구분이 아니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피하려고 살아간다. 

죽음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자연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살아간다. 


붓다는 생로병사가 고통이라고 말한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삶의 연속적 과정. 그 자연스러움은 진정 고통인가? 

죽는 것과 죽지 않기 위해 연명하는 것 중 무엇이 더 고통인가? 

우리는 연명하면서 행복한가? 


삶은 자연스럽지 않음을 전제로 영위된다. 

그리고, 그 끝에는 불행만이 존재한다. 


죽음 이후, 그 시간은 행복인가? 

죽음 이후, 그 시간은 존재하는가? 

죽음 이후, 그 시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반 자연을 위한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이것은 긍정적인가?

자신이 자연인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긍정적인 것인가?

자신을 자연인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인가? 

고양이는 자신이 자연스러운 동물이라고 외치는가?


우리에게 내일을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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