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하순이다. 더딜 것만 같던 시간이 예상과 다르게 뜀박질을 하고 있다. 이러다 눈 깜짝할 새 12월이 들이닥칠 것 같아 슬쩍 겁이 난다.
올해는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새해가 되면 정갈한 마음으로 해맞이를 하고, 양가 부모님께 전화를 드린 후 떡국을 끓여 먹고는 한해의 다짐을 기록한다. 새 다이어리를 펼쳐 마음을 가다듬는 그 순간은 다가올 날들을 잘 살아내기 위한 나름의 의식이다. 그런데 올해는 ‘새해맞이 필수 의식’을 생략했다. 그로 인해 ‘작심삼일의 기쁨과 슬픔’도 사라졌다. 이 모든 게 심각한 무기력 때문이다.
모두가 인정할 만큼 열심히 일했다. 이만하면 잘 살아내고 있다고 여기던 몇 해 전, 예상치 못한 ‘번아웃 증후군’이 찾아왔다.
‘안 되겠어. 멈춰야겠어.’
‘네가? 겁쟁이잖아. 할 수 있겠어?’
마음과 마음이 팽팽한 겨루기를 했다. 멈춰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팡질팡하느라 시간은 가고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나의 고용주 또한 일 좀 하는 직원을 쉽게 놓아버리지 못했다. 무려 다섯 해 가까이 사직서를 품고 지루한 싸움을 이어갔다.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했지만, 쉽게 정리되지 않는 현실이 복잡하고 원망스러웠다. 몹시 지쳐서 눈물이 났다.
‘도망치자, 가서 나를 찾자!’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마흔다섯, 퇴사를 감행했다. 모두가 “인제 와서 왜?”라고 묻는 중년의 나이였다. 그렇게 15년 가까이 밥줄이 되어주었던 두 번째 직장에서 도망치듯 탈출했다.
홀가분했다. 사느라 종종걸음 치던 발걸음은 가벼워졌고, 마음은 여유로웠다. 살림살이에 반짝반짝 광을 내고, 세끼 밥상을 차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온전히 주부로 사는 기쁨은 생각보다 달콤했다.
“엄마랑 평일에 시장 떡볶이를 먹다니!” 두 딸은 소소한 일상에 물개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일하느라 바빠 초등학교 입학식은커녕 대학생이 되도록 학교 행사 한 번 제대로 챙기지 못한 엄마가 밉지도 않은 모양이다. “살림에 애쓰지 말고 자기만의 시간을 즐겨.” 그동안의 노고를 인정해 주는 남편의 배려까지 더해지니 참으로 생광스러운 백수 생활이었다.
안타깝게도 딱 거기까지였다. 100일도 넘기지 못하고 지루함이 찾아왔다.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스치던 계절을 온전히 느껴보려던 아침 산책길에서 흔들리는 나를 만났다. 자연에 머물던 시선이 어느새 출근하는 사람들을 쫓아가고 있었다. 나 홀로 느린 달팽이가 된 것만 같아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혼자 놀 줄 모르는 바보였다. 일을 쉬어 본 적도, 사람 틈에서 벗어나 본 적도 없으니 금방 무료해질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찬찬히 내 마음을 다시 들여다봤다. 내게 필요한 건 휴식이지 단절이 아니었음을 곧 알아차렸다. 허탈하지만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미 뽑아 든 칼, 도로 거둬들이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썩은 무라도 썰자는 심정으로 6개월을 꾸역꾸역 버텼다. 그리고 다시 ‘일하는 사람’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중년의 시간은 백 미터 달리기 같았다. 눈 깜짝할 새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일하는 기쁨을 다시 누리던 어느 날, 이번엔 코로나를 만나 예상치 못한 경로 이탈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췄다 흐르기를 반복하는 동안 서서히 지쳐갔다. ‘코로나 우울’이 찾아왔음을 눈치챘을 때 공허한 들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몇 해 전 퇴사를 감행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럭저럭 잘 살아내고 있지만, 그때보다 더 두꺼운 가면 속에 나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제대로 멈춰보고 싶어졌다. 용기 내 또 한 번 쉼표를 찍었다. 스스로 ‘안식년’이라 이름 붙였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평온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사라진 명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느라 더 애쓰며 안식년을 살고 있다.
오래전부터 ‘쉰’을 기다렸다. ‘오롯한 나’로 인생 2막을 살고 싶은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내 나이 마흔아홉, 곧 바라던 쉰이다. 기뻐서 날뛰고 싶으나 인생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단단히 마음먹고 시작한 안식년에도 사십 대의 방황은 질척거리며 따라붙었다. 바깥일에서 멀어지는 순간 말로만 듣던 갱년기 증상까지 들이닥쳐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다. 온몸이 축 늘어지니 뭘 해도 재미가 없고 무기력했다.
나답지 못한 모습에 실망이 쌓여가던 어느 날, 내 속이 궁금해졌다.
‘나는 누구지?’
‘좋아하는 게 뭐야?’
‘쉬어가도 괜찮겠어?’
‘뭘 하고 싶어?’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대답이 사라질 것 같아 묵혀 둔 일기장을 꺼내 끼적이기 시작했다. 뭐라도 쓰다 보면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으니 오래전 쓰다만 노트 한 권이 생각났다. 이내 베란다 한구석에 방치해 둔 작은 상자를 찾아냈고, 삼십 대의 나의 일기장과 마주했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던 때라 띄엄띄엄 쓴 푸념에 가까운 일기였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잃어버린 기억들이 살아났다. 그 안에 눈에 띄는 한 줄이 있었다.
‘쉰에는 작가!’
가슴이 뛰었다. 내가 작가를 꿈꿨다고? 도대체 뭔 자신감으로 그런 꿈을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쓰고 싶은 열정이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못 본 걸로 해! 글은 타고난 사람들만 쓰는 거야.’ 다행히도 나는 글쓰기에 대한 별다른 갈증 없이 살아왔다. 까마득히 잊고 지냈으니 진짜 꿈이 아닌 게 분명했다. 바람만 가득 찬 곧 터질 풍선이라 여기니 잠깐의 설렘은 조용히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작가가 되었다. ‘브런치’에 한 번에 당당히 합격한 새내기 작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름드리나무로 가꿀 능력이 없으니 ‘닥치고 책이나 읽자!’ 싶었다. 마음먹고 고른 책의 제목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쓰는 사람을 위한 반복의 힘』,『쓰다 보면 보이는 것들』,『끝까지 쓰는 용기』하나 같이 쓰기에 관한 책들이었다. 우연이라 여겼지만 이쯤에서 조금 헷갈렸다.
혹시 쓰고 싶으세요?
이 나이에 무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써 본 적도 없고 잘 쓸 능력도 없으니 답은 명확했다.
읽기에 몰입하던 어느 시간, 책 속 평범한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글쓰기를 시작하겠다는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을 이루고 있는 세계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겠다는 사람들이었다.
밑줄을 긋고 수첩에 옮겨 적었다. 쓰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지만 나는 지금 절실히 나의 세계를 찾는 중이었기에 특별함으로 다가왔다. 곱씹어 읽었다. 읽다 보니 쓰고 싶어졌다. 그렇더라도 마음은 곧장 글쓰기로 향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써야 할 이유를 모르겠고, 어떤 날은 쓰고 싶은 용기가 생기기도 했다. 갈팡질팡의 연속이었다.
예정된 안식년의 끝이 보이는 순간 마음이 조급해졌다. 자책하며 몰아붙이다 보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꼬박 1주일 동안 몸살을 앓았다. 아픈 뒤끝은 왠지 모르게 개운했다. 일기장을 펼쳐 새로운 목표를 적었다.
‘쉰에는 작가처럼!’
대나무 숲에 바람이 들었던 걸까? 2월의 끝자락, 귀인이 나타났다.
글쓰기 하시겠어요? 마감날을 정해 놓고 뭐라도 써 봅시다.
별안간 날아든 카톡에 심장이 방망이질했다. 애정하는 작가님의 우발적이자 자발적인 '마감 독려'였다. 우린 SNS 친구다. 하지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다. 작가님이 나한테 왜? 이 제안을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기쁘지만 두렵고, 감사하지만 망설여졌다. 어디서 점쟁이 빤스를 주워 입으셨는지 빼꼼히 열어둔 문틈을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글쓰기는 엄청 큰일 아니에요. 그냥 하면 또 써집니다.
덧붙인 한 마디에 망설임은 끝이 났다. ‘써 보겠습니다!’ 바닥을 치던 용기가 올라왔다. 너무나 보통 사람이라 쓸 이야기도 없고, 타고난 재능도 없다. 잘 쓸 자신도 없었다. 마감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머리를 쥐어뜯을지도 모른다. 밥벌이하느라 쓸 시간이 없다고 징징거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글을 써 보려는 이유는 내 안의 나를 꺼내놓기 위함이다.
3월 1일, 학교 안 가는 개천절에 ‘우발적 글쓰기’는 시작되었다. 빨간 날에 '닥치고 쓰라'는 자비 없는 첫 숙제를 받았다. 벌써 마감일이 코앞이다. 역시나 글쓰기는 만만치 않았다. 깔딱 고개를 넘어가는 것처럼 버거웠지만, 쓰는 틈에 무기력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던 내가 글쓰기로 인해 새벽 기상을 시작했다. 이러다 정말 쉰에 작가가 될까 봐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