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중국) 출국한지 불과 4시간. 현타가 찾아왔다.
24시 오픈
철통보안경비
남여분리화장실
와이파이
대형 스크린 TV
빵빵한 에어컨
이용료는 공짜인
전세계적 24시 숙박시설
바로 공항이다.
해외에서 갑자기 돈 떨어졌을때,
낯선나라에서 잠잘 곳을 찾지 못했을 때,
안전의 위협을 느끼는 긴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공항은 늘 나에게 든든한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1년 뒤에 건강하게 돌아올께'
혼자 세계여행을 떠나는 딸.
공항으로 배웅을 나온 엄마 아빠.
씩씩하게 손을 흔들며
공항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엄마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그렇게 인천공항을 떠나온지 불과 4시간.
나는 16kg 배낭을 짊어진채로
땀을 뻘뻘흘리며
상하이 시내 한복판을 헤매고 있었다.
(상하이/중국)
'도대체 망할 숙소는 어디에 있는거야'
엄청난 인파행렬
난생처음 느껴보는 어깨를 짓누르는 등짐의 무게
설상가상으로 배터리가 나가버린 핸드폰
엎친데 덮친격으로 갑자기 터져버린 생리
가장먼저 찾아온 건 예상했었던 어려움이었고
뒤를 이어 '설마~'했던 문제들이 벌어지더니
마지막으로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문제까지 터졌다.
누군가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라 했던가.
'아 신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호기로웠던 출발만큼
나의 여행 첫날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그렇게 배낭을 메고 숙소를 찾아 헤매기를
3시간? 4시간쯤 지났을까.
나는 결국 상하이 광장 한쪽에 주저 앉았다.
'하..더 이상은 못걷겠어...'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갑자기 온갖 서러움이 몰려왔다.
아까 날 배웅해주었던 엄마, 아빠가 보고싶었다.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까짓 배낭은 개나 줘버릴까 확'
'당장 한국행 비행기를 잡아 타고 돌아갈까?'
'애초에 내가 왜 여행을 한다고 해가지고'
'도대체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냔 말이야'
나는 그렇게 한참을 주저 앉아있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할지
도무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눈앞에 편의점 하나가 보였다.
갑자기 갈증이 느껴졌다. 땀을 많이 흘렸나보다.
'일단 목이라도 축이자'
힘이 풀려 다리가 휘청거렸다.
간신히 일어나 다시 배낭을 메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입대한 절친이 세계여행선물이라며
군대에서 보내준 군용가방은
어째 시간이 갈수록 무겁게 쳐지는 것만 같았다.
여행의 중간쯤가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행용 백팩은
무게를 분산시켜주고 안전하게 지탱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가지 과학적인 기능들이 탑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무게를 허리로 분산시켜 준다거나,
어깨에 폭신한 패드가 들어있다거나 하는.
하지만 군용배낭은
날것 그대로 모든 무게가 어깨에 실렸다.
모두가 나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하이의 한 편의점에서
탄산음료를 하나 사들고 벌컥 벌컥 들이켰다.
갈증이 해소되고 나니
마음도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 사이 해는 저물어 밖은 더 어두워졌고
여기서 숙소를 찾을 가능성은 희박해보였다.
고민을 하다 문득 묘안이 떠올랐다.
'그래 공항으로 다시 돌아가자.
상하이에서 밤을 안전하게 지샐 수 있는 곳은
공항밖에 없어'
나는 공항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패잔병처럼 지친 몸과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지하철에 올라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왠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공항으로 겨우 다시 돌아온 나는
몸을 간신히 뉘울수 있는 길다란 의자에서
배낭을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나의 세계여행 첫날 밤이 깊어갔다.
+ PS
공항은 배낭여행자인 나에게 늘 최후의 보루이자,
언제라도 후퇴할 수 있는 안식처,
편안하게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임시보호소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해가 뜨고 안전함의 시간이 밝아오면
공항은 금새 낯빛을 바꿨다.
지난밤 나를 품어주었던
그 따스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공허함, 불안, 초조함이 찾아온다.
저마다의 목적지로 바쁘게 향하는 사람들의 행렬의 가운데
혼자 갈길을 잃고 방황하는 듯한. 멈춰있는 느낌.
지난밤 나를 품어주었던 공항은
이제 낯빛을 바꾸고 나를 재촉하기 시작한다.
'어디로든 떠나갈시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