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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Mar 27. 2022

운동화 끈을 풀었다.

(나폴리/이탈리아) 그가 떠나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여운이 남았다.


(나폴리/이탈리아)


주유소에 들러 가득 채우면

얼마간은 기름 신경 안 쓰고 달릴 수 있듯이


멜과 사만다는

텅 비어있던 내 마음을 가득 채워주고 떠났다.

덕분에 얼마간은 괜찮을 것 같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짧은 일정으로

여행을 떠나온 멜과 사만다는


남부 여행을 마치고

서둘러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모든 것이 낯선 해외에서는

일행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딜 가나 든든했고


혼자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별 것도 아닌 일들이

웃기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함께 떠나자는 제안에

고민하고 고민했다.


껴안고 작별인사를 하며

둘이 짐을 챙겨 숙소를 떠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지만

나는 떠날 수 없었다.



설명이 필요 없는 도시, 로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로 꼽히는, 나폴리

BBC 선정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아말피

할리우드 영화로 이미 익숙한, 폼페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꼭 봐야 한다는 유명 관광지를

빠짐없이 챙겨 다녔지만


뭐랄까. 아쉬웠다.

겉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폴리의 공기를 마시며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것인데.

 

미술관 벽에 걸린

실감 나게 그려진 나폴리 해안도로 그림을

구경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림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 속에서 해안가를 걷고 있는

행인이고 싶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


길을 걸으면서 보았던

나폴리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하루를 보내리라.


다짐하며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끝없이 펼쳐진 해안도로를 따라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달리는 사람들을 보니

레깅스에 가벼운 조깅화를 신고

나도 해안을 따라 달리고 싶었다.


왠지 타이트한 청바지가

나를 더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조금 더 해안을 따라 걷다 보니

부두에 고깃배들이 들어와

수확한 것들을 내리고 있었다.



'아 맞다. 나폴리가 항구였지'



물을 받고 있는 대야 안에는

신선한 오징어와 생선들.


분주한 어부들과

모여들어 구경하고 흥정하는 사람들.


강원도 속초의 여느 항구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조금 더 해안을 따라 걸었다.

가끔씩 기분 좋게 머리를 흩트리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여기가 좋겠다'


한참을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은 해가 질 때까지

여기서 시간을 보낼 작정이다.




배가 고플 때를 대비해

간식도 든든히 챙겨 왔고


심심할 때를 대비해

책도 3권이나 들고 왔다.






햇살은 적당히 따뜻했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바다는 대체로 잔잔했다.

가끔씩 바위에 파도가 부딪쳐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해안도로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노천카페들이 영업 준비를 하는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널찍한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방에서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책이 몇 장이나 넘어갔을까.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벌써 점심시간인가?'




나란히 앉은 모습이 편안한 커플.


미드에서 나온 듯한

비키니를 입고 신나게 떠드는 여자아이들과

그 옆에 걸터앉아 있는 훈남.


함께 일광욕을 하는

나이 든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시선으로 아이들을 쫒으며 수다를 떠는 아주머니.



'저 둘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저 중에 애인이 있을까?'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이 보내고 있을 하루를 상상하며

나폴리 해안을 찾은 사람들을 구경했다.




한참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셔츠에 바지를 차려입고

선글라스를 낀 말끔한 남자는

20대 중반이나 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나를 향해 다가오던 그는

나를 지나쳐 대각선 앞쪽에 멈춰 섰다.





그리고 셔츠를 벗더니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내 시야에 정확히

그가 들어와 있었다.


어머! 이 사람 뭐야. 왜 이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는 거...


 



하지만 그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바지까지 벗어던졌다.

마치 나라는 사람이 없다는 듯이.


속옷 차림이 된 그는

태연하게 타월을 깔고 누워 핸드폰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한 15분. 20분쯤 지났을까.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자리를 떠났다.






나도 많이 봤다.

수영장에서도 해수욕장에서도.


바로 옆 해변에도

수영복만 입은 남자는 많았다.




하지만 처음이었다.




출근할 때 입을 법한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멀쩡하게 길을 가던 사람이


갑자기 입고 있던 모든 옷을 벗어젖히고

세미 누드로 일광욕을 즐기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옷을 챙겨 입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모습은.






자유로움.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움

점심시간에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내는 자유로움

여행과 일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움

 

그가 떠나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여운이 남았다.






나도 그처럼.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처럼


입고 있는 옷을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단단히 묶여있는 운동화 끈을 풀었다.




그리고

운동화를 벗었다.

하얀 양말도 벗었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스쳤다.


아니 내가 느낀 것은

바람이 아니라 자유였을지도.





겁 없이 떠나왔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씩씩했고 괜찮다고 태연했지만.


이 모든 것이 처음인 나는

낯선 곳에서 혼자인 나는


사실은 무서웠고

많은 것이 두려웠다.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나는 단단한 껍데기 속에서

잔뜩 긴장한 채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발을 간질였다.


나는 이제야

여행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세상에 나를 내던질 준비가.


껍데기 밖으로 한 발짝

발을 내디딘 것만 같았다.




나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이 순간을.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바다를 바라보고 누워

한참을 머물렀다. 






해가 저물 때까지.








저녁.

노을이 환상적이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나는 생각했다.



'내일은 떠나자.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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