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0년 5월의 어느 날
Obertraun 8-1, 4831 Obertraun, Austria, 오스트리아 오버트라운 씨스트라베 8-1번지. 우리 집 주소다. 나무 대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가면 작은 전실이 나온다. 미닫이문을 열면 검은색의 작은 난로가 보인다. 거실에 2인 소파가 놓여 있고, 큰 냉동고와 냉장고가 거실 절반을 차지한다. 장사에 쓰일 재료 보관 때문이다. 냉장 시설에 비해 작은 주방이 나무 계단 아래 오른쪽에 있다. 개수대 앞에 격자형 창으로 마을이 보인다. 계단을 두 번 돌아 2층으로 올라가면 방 두 개와 욕실이 있다. 방 하나는 부부 침실이고 다른 방은 서재 겸 컴퓨터 방이다.
오전 5시 반, 잠에서 깬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책상에 앉는다. 어제의 일과 중 기억에 남는 사건과 이미지, 생각을 적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적어 내려간다. 매일 같은 일상인데 쓰다 보면 7시 알람이 울린다. 남편이 깬다.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로 아침을 먹고 이메일을 확인한다. 한국, 오스트리아 뉴스를 보다 보면 9시다. 10시까지 각자의 시간을 갖는다. 2층 발코니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자잘한 집안일을 처리하다 보면 출근 시간이다. 저녁에 미리 확인했지만, 오늘 사용할 재료를 다시 점검하고 차에 싣는다.
오버트라운은 할슈타트 호수를 사이에 두고 할슈타트 맞은편에 자리한 마을이다. 호수를 빙 둘러 차로 20분 거리인 오버트라운은 리조트와 숙소가 할슈타트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차로 이동하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어서인지 잠시 들르는 관광객은 거의 없고, 휴양으로 오래 머무는 사람이 많다. 우리 집은 오버트라운에서 가장 큰 리조트인 도르미오 리조트 맞은편에 있다.
우리 부부의 일터는 할슈타트 마르크트 광장의 핫도그 가판대다. 11시 오픈에 맞춰 반죽과 재료를 세팅한다. 한국의 핫도그 가맹본부와 계약을 맺고 일주일에 두 번 항공으로 화물을 수입한다. 반죽의 특성상 해상 수입은 불가하여 소량 화물로 들여오고 소시지는 현지 업체에서 공급받는다.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할슈타트는 물가가 꽤 높다. 식당에서 제대로 한 끼 식사를 하려면 1인 20유로가 훌쩍 넘는다. 핫도그는 4유로. 한 끼 대용은 되지 않아도 간식거리로 인기가 많다. 가판 문을 닫는 시간은 6시이지만, 재료 소진으로 인해 거의 4시 전에 정리한다. 월, 화를 뺀 주 5일의 장사로 둘의 생활비와 주거비를 충당할 정도의 돈을 번다. 이 정도로 충분하다.
쉬는 날, 남편과 고자우 트레킹을 간다. 우리가 오버트라운에 터를 잡은 이유는 고자우 때문이기도 하다. 20여 년 전 난 뇌출혈을 겪었다. 삶이 한순간에 끝날 수도 있다는 경험을 하고 나니 사는 게 의미 없고 무기력해졌다. 죽으면 유골을 유럽 곳곳에 뿌려달라는 진심 어린 유언을 농담처럼 해왔던 내 말이 더 이상 듣기 싫었는지, 남편이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온갖 휴가를 끌어모으고, 아이들은 체험학습 신청서를 낸 후 한 달간 유럽을 여행했다. 평생 꿈꾸던 유럽에 갔는데 별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차만 타면 잠에 빠졌다. 6시도 되기 전에 숙소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여행 중반쯤 오버트라운에 머물며 근처를 돌아다니다 고자우에 들렀다. 고자우 호수가 다흐슈타인 산을 배경으로 웅덩이처럼 고여있었다. 작은 호수를 둘러싼 두 산봉우리 사이로 눈이 녹지 않은 산이 보였다. 5월 중순이었다. 호수 너머의 풍경이 호수에 거울처럼 반사되어 비쳤다. 홀린 듯 호수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호수 끝이 눈에 들어와 금세 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걸을수록 호수 끝이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다 돌기는 어렵겠다 싶어 되돌아왔다. 이후 고자우 호수와 산비탈 아래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집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계속 떠올랐다.
아이들이 독립한 후, ‘거주지를 옮긴다면 오버트라운’이라고 남편을 세뇌시켰다. 듣다 지쳤는지 외국살이는 절대 싫다던 남편이 잠시는 괜찮다며, 5년 기한으로 우리는 오버트라운에 터를 잡았다. 최소한의 짐을 소량 화물로 받아 이사를 마쳤다. 오버트라운에서 생활을 꾸리고 있는 지금, 이건 꿈이 아니고 현실이다.
참여 중인 글쓰기 강좌에서 미래에 내가 살고 싶은 집을 써보는 과제가 주어졌다. 살고 싶은 집의 형태는 없다. 살아보고 싶은 장소가 있을 뿐. 막연했던 상상을 글로 쓰다 보니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