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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늠 Aug 15. 2022

조금 다른 인간

2022년 7월의 어느 날

 아이는 자명종 소리에 깬 적이 거의 없다. 밥 먹으라는 소리에 깨서 일어나 밥을 먹는 경우가 아주 많다. 친구와 온라인에서 만나 게임을 하느라,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은 일 다음으로 미루다 숙제를 시작했다. 새벽 2, 3시에 잠드는 아이의 수면 패턴을 바꿔보려 충고, 꾸중을 해보았지만 아이는 바뀌지 않았다. 아이는 늦게 자도 할 일 다 하고 잔다며 당당했다.


 아이가 예상 도착 시간보다 늦게 귀가하는 일이 간혹 있다. 기다리고 있을 부모에게 자신의 행방을 알리지 않아 아이를 찾느라 맘을 졸이는 나와 달리 아이가 늦게 들어오는 이유는 다양했다. 어느 날 저녁 7시 30분에 수업이 끝났는데 9시가 되도록 귀가하지 않았다. 전화도 카톡 음성통화도 받지 않았다. 학원에 확인하니 8시 5분에 수업이 끝났다고 했다. 아이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나는 이미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귀가한 아들과 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그날은 수업 시간이 바뀐 첫날이었다. 어제 학원 끝나는 시간을 물었을 때 7시에 끝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제가 7시 30분이라고 말했잖아요.” 아이가 대답했다. 밥 먹을 때 말했다는데 함께 식사했던 나와 남편 모두 아이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아이는 발성이 또렷하지 않다. 웅얼거리는 목소리 때문에 못 알아듣는 일이 평상시에도 많았다. 원래 수업 시간이 1시간 30분이니 끝나는 시간을 아이가 잘못 알고 얘기한 걸 수도 있다. 그러나 말하려는 요지는 그게 아니었다. 8시 5분에 수업이 끝났는데 9시가 다 되어 들어오면 그사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 생각은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지금은 9시가 아닌 8시 56분이고, 자기가 전화한 시간은 8시 46분이라고, 시간을 늘려서 말하지 말라고 대꾸했다.


 아이와 나의 대화는 논점을 벗어나 서로가 갖고 있던 불만을 바탕으로 헛돌았다.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남편이 아이 앞에 섰다. 엄마가 너에게 화가 난 이유는 네 행방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올 시간에 오지 않으면 걱정을 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그러니 문자나 전화로 어디를 다녀올 것인지, 집에 오는 중인지 알려주는 게 가족에 대한 배려라고 말했다.


 아이가 엄마는 너무 과장해서 말한다며, 그동안 내가 부풀린 시간과 사건에 대해 나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남편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엄마에게 말하면 되는 거라고, 네가 주눅이 들어있는 상태로, 말을 하지 않으면 엄마는 알 도리가 없고, 더 답답해한다고 말했다.


 아이가 나한테 주눅이 들어있다고? 나는 아이가 반항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한 마디도 물러서지 않고 나의 말실수와 행동의 연속되지 않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남편이 아이가 내 앞에서 주눅 든 모습이라고 말했다. 남편은 아들과 내가 주고받는 말과 행동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는 제삼자이니, 그의 관찰이 정확할 것이다.


 결혼 전 친정집 근처 한정식집에서 상견례가 있던 날, 예비 시부모님은 대가족이었던 예비 며느리 집안에 밀리지 않기 위해 시이모 부부와 함께 내려왔다. 내 일로 인해 온 가족이 모두 한 공간에 모인다는 게 낯설고 어색했다. 부모님은 시부모님에게 예의가 발랐고, 식사를 마친 후 음식점 주차장에서 떠들썩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나는 몇 년 후 시아버지가 상견례 후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새아기가 아버지 앞에서 너무 기가 죽어 있어 안쓰러웠다고... 상견례를 나눈 방에서 난 아버지 옆에 앉지 않았고, 얘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잠시 만난 자리에서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어떻게 눈치챘을까.


 난 아버지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나에게 엄마는 ‘그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내가 언젠가 난 이렇게 생겨 먹은 사람이니 너도 엄마의 성향을 이해하고 서로 조심할 건 조심하자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닮고 싶지 않은 대상이 했던 행동과 말투를 내가 강도만 약하게 아이에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결이 다를 뿐이지 아이와 나의 관계가 나이가 들수록 말이 통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간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내 상처를 아이에게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섭고, 밉고, 어이없고, 용서되지 않는 존재였다가 불쌍한 사람이 된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내 말투를 점검한다. 난 아이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아이가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불렀다는 노래를 일부러 찾아 듣고, 아이가 좋아하는 초코빵을 사고, 아이 먹일 국수를 끓이며 생각했다. '내가 덜된 어른이니 아이에게 네가 이해하라는 말을 했던 난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인간이구나, 오늘은 어제보단 조금 나은 사람이 되어보리라'고 말이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때도 난 육아의 고됨에 아이들에게 때론 화를 냈다.

앞으로 10년 후, 난 지금의 아이 모습을 보며 그게 다 성장의 단계였다고, 그때 좀 더 참을 걸.. 하며 후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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