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광주 Mar 22. 2023

이황선생과 골프

천 원 내기도 경쟁 그 자체로 희열을 느낀다. 

  골프를 즐기는 마니아다. 연간 칠팔십 회 라운딩을 나가니 그리 말할 수 있다. 운동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다. 건강을 위해, 침목 도모, 사업상 접대…. 나는 경쟁을 즐기는 편이다. 기록에 도전하는 경쟁이고, 상대방과 우월을 다투는 경쟁이다. 그중에서 내기 골프는 희열을 느끼기에 최고다. 즐기려고 내기를 하는데 갈등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함께 다니는 골퍼들은 이황 선생 내기 게임을 한다. 부담 안 되는 범위 내에서 즐길 수 있는 최대 공약수를 찾아낸 결과다. 처음부터 이황 선생으로 내기를 시작한 건 아니다. 스킨스 게임 할 땐 홀당 이삼만 원, 스트로크 게임에선 타당 오장이라 하여 오천 원, 만 원 내기를 기본으로 세종대왕 몇 장씩 주고받았다. 라운딩 한 번 나갈 때 세종대왕 서른 장 정도는 기본으로 챙겨가야 했다. 세종대왕 내기 골프를 할 때 즐거움이 더 컸을까? 뒤돌아 생각해 봤다. 매 홀 동반자 간 감정이 예민해진다. 타수 계산은 정확한지? 혹 알까기는 안 하는지 의심하고 경계한다. 컨시드 주는 문제로 마음 상하고, 동반자 열받게 하는 경우도 흔하다. 금액이 큰 만큼 갈등과 후유증이 커진다는 것을 경험한 은퇴 골퍼들의 선택은 이황 선생 내기다.

   변한 건 근육 빠지고 피부가 쪼그라진 것뿐이고 경쟁심은 더 커졌는데도 내기 게임은 세종대왕에서 이황 선생으로 쪼그라들었다. 게임 방식도 두 명이 팀을 이루어 경쟁하는 라스베이거스 방식으로 바꿔 하위 성적을 낸 동반자도 많이 잃지 않도록 배려하며 즐기는 골프를 한다. 


  천 원의 쓸모를 생각해 봤다. 초등학생 손주에게 천 원짜리 세뱃돈을 주자 요즘 세뱃돈은 세종대왕이 기본 단위란다. 초등학생도 무시하는 이황 선생이 이순을 넘긴 우리들의 내기 골프에서 귀하게 대접받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땐 무시하듯 천 원을 대했다. 돈에 가치로 생각하여 그까짓 거 천 원 잃어 봤자 몇 푼 된다고! 몇 라운드 돌면서 천 원짜리 한 장이 돈에 가치가 아닌 감정선을 건드리고 있음을 느꼈다. 이황 선생께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어 동요하지 않음이 마음의 근본이다’라고 했음에도 게임에서 몇 홀 패하자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오래전 상주에서 발생한 노인정 ‘살충제 사이다 살인사건’도 백 원짜리 화투 놀이가 노인의 감정선을 통제하지 못해 갈등에서 발생했다는 뉴스가 생각난다. 마음 상하게 하는 데 금액의 크고 작음이 차이가 있는 건 아니었다. 지폐 한 장을 지켜내려 매 샷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진정한 이황 선생의 가치다. 

  나이 지긋한 신사들이 비싼 골프장에서 운동하면서 가랑잎 내기한다고 쪼잖하다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다. 사십 대 아들이 물었다. 

  “아버지 천 원짜리 잔돈 내기를 뭐 하러 하세요? 재미도 없을 텐데!” 

  “젊은 사람은 돈내기를 하는 거고, 아버지는 경쟁을 즐기는 거니 목적이 달라. 금액에 무관하게 경쟁은 긴장하는 묘미가 있거든.”

  천 원 지폐 한 장은 승부 욕구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촉매제다. 때론 감정을 격하게 만드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 홀 끝날 때마다 천 원짜리 한 장 받으며 “아 싸- 이번에 내가 이겼어!”라며 좋아하는 모습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 다르지 않다. 천 원의 가치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18홀 내내 대화를 이어주는 소재로 작용한다. 

  “난 지난 라운딩 때 망신당했어. 달랑 네 개 먹었더라고. 이상하게 안 되는 쪽으로만 끼는데 열받아 죽는 줄 알았어!” 

  “집에 가면 마누라가 얼마 따 왔냐고 묻는 거야. 거짓말했지. 싹 쓰리 해왔다고.”     


  운동 끝나면 천 원짜리의 가치는 역전된다. 귀하게 여기며 딴 이황 선생의 가치는 손주도 받아가지 않을 쓸모없는 천 원 가치로 추락하는 반면, 잃은 천 원은 ‘두 가지, 세 가지 일(퍼터, 드라이버 실수)로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이황 선생께서 말했음에도 실수에 대한 자책으로 남는다. 

  호주머니에서 이황 선생 얼굴에 주름살 가득 잡히도록 꼬깃꼬깃 한 지폐를 꺼내면서 말한다. 하나, 둘, 셋…. 에이 오늘도 다섯 개 잃었네! 천 원, 이천 원 돈이 아닌 패(敗)의 숫자로 셈을 한다. 

  “아! 이번에도 실수 많았어.” 다음엔 한 샷 한 샷 긴장해서 쳐야겠다며 각오를 다진다.      



  운동 끝나고 동반자 중 한 명이 저녁을 사겠다고 한다. 열두 홀 먹었으니 올해 들어 성적이 가장 좋다며 큰 대회 매치플레이 경기에서 우승이라도 한 듯 기분이 들떠 있었다. 음식이 차려지는 동안 스코어카드를 꺼내본다. 어릴 적 성적표를 받아보고 아쉬워했던 마음으로 승패 홀을 확인하며 아쉬웠던 순간을 복기한다. 식사 중에도 경기 평가는 계속된다. 

  “겨우 여섯 개 먹었네!” 

  “퍼터 짧은 거 놓친 게 몇 갠 줄 몰라, 열받아 죽는 줄 알았어.” 

  “나는 말도 마! 드라이버 잘 쳐놓고 어프로치 뒤땅 나서 돌뻔했어.” 홀마다 벌어졌던 에피소드가 반찬으로 등장하며 경기 여운이 끝나질 않는다.      


  ‘만 가지 이치(골프 기술), 하나의 근원(실수)은 단번에 깨쳐지는 것이 아니므로 참마음, 진실된 본체(실력)는 애써 연구(연습)하는 데에 있다.’는 이황 선생의 가르침으로 오늘 실패에 대한 교훈으로 삼아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아리 사람 여의도 사람 그리고 서울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