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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Feb 20. 2023

미아리 사람 여의도 사람 그리고 서울 사람

그곳에 산다고 같은 삶이 아니다.

  벌건 대낮에 여자 혼자 있는 아파트에 들어가 봤다. 한 집이 아닌 수백 세대의 생생한 생활 현장을 봤다. 1978년으로 돌아가 본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기다리던 중. 용돈이나 벌자고 친구 따라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일당 삼천 원짜리 잡역부다. 일하는 곳은 1971년에 지어진 여의도 아파트다. 그 지역에 최초로 건설된 소위 맨션아파트다. 서대문 냉천동 와우아파트 붕괴사고(1970년) 이후 청와대 특명으로 가장 튼튼하게 지은 아파트라고 했다. 경비실, 세대 간 연락 가능한 인터폰 시설이 없어 추가 설치하는 공사였다. 주민이 사는 천팔백 세대를 일일이 방문해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아리 산동네에서 자취하던 이십 대 시골 청년이 아파트라는 생소한 주거형태를 볼 수 있었던 건 충격이었다. 수세식 화장실, 항시 온수가 나오는 샤워장, 가스레인지…. 연탄아궁이, 물지게, 재래식 화장실의 산동네와는 너무 달라서다. 강남지역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이라 여의도는 서울의 신흥부촌이었다. 호텔에서나 볼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부터 출입구마다 말끔한 정복을 차려입은 경비원이 드나드는 주민에게 거수경례하는 모습도 신기했다. 놀라운 건 검은색 자가용이 즐비하게 주차된 모습이었다. 여의도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사는 범접할 수 없는 동네인 것 같았다.     



  나이 지긋한 아파트 경비는 우리와 말할 때 입주민을 대할 때의 공손함은 없었다. 주민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말 것을 지시하듯 말했다. 이어 방문할 세대에 대하여 설명했다. 101호 아주머니는 성깔 있으니 조심하고, 404호는 술집 아가씨들이 세를 살고, 702호는 경찰서장 집이니 신경 쓰고, 1004호는 기업 사장 세컨드가 혼자 사는 집이라며 자세히 말해주었다.

  공사를 위해 집안 가구를 옮기는 것이 아르바이트생의 일이었다. 404호 초인종을 눌렀다. 몇 번 눌러도 반응이 없더니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순간 당황하여 시선을 고정할 수 없었다. 긴 생머리에 가슴골이 드러나고 아슬아슬한 티팬티 모양이 훤히 비치는 잠옷 바람의 아가씨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잠이 덜 깬 듯한 목소리로 “피곤해 잘 거니까 일하세요.”라며 침대로 돌아갔다. 난감했다. 침대를 옮겨야 한다고 말하자 그냥 하란다. 반라의 아가씨가 누워있는 상태로 옮기기로 했다. 젊은 인부들은 공사보다 누워있는 아가씨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음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다리 쪽 침대 귀퉁이를 높게 들라고 눈짓으로 사인을 보냈다. 침대가 기울자 기대했던 대로 이불이 흘러내렸다. 희고 긴 다리 일부가 드러났다. 김 씨가 조금 더 기울이라고 눈짓을 한다. 더 많은 부분을 기대하느라 공사는 뒷전이다. 긴장 속에 이루어지는 탓에 숨을 몰아쉬고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그때 옆방에서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아주 어색한 표정으로 바지 지퍼를 올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젯밤 같이 온 손님인 듯했다. 


  파마머리의 두상이 크고 뚱뚱한 702호 아주머니는 우리를 아래위로 훑어본다. 무시하는 듯한 말투며 눈초리는 감시할 자세다. 쫓아다니며 비싼 가구니 조심하라는 등 갑부처럼 거들먹거린다. 불쾌한 건 우리를 도둑으로 의심하는 듯한 태도다. 무엇을 훔쳐갈까 봐 의심하고 따라다니는 거였다. 벗어놓은 옷가지가 이곳저곳 널브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게으른 아줌마 같았다. 다른 집과 비교해 보니 그 집엔 비싼 가구도 귀중품도 없어 보였다. 변두리 살다 스물두 평 아파트 한 채 장만하고 보니 가장 성공한 부자로 도취해 사는 찌질이 아줌마 같았다.


  1301호는 첫 방문부터 공손한 존댓말이다. 현관을 열어주며 “수고가 많으세요.”라며 인사를 건네더니 잠시 차 한 잔 마시고 하란다. 오십대로 보이는 집주인은 조용하고 차분한 말투로 “편하게 일하세요.”한다. 도둑 취급하던 찌질 아줌마하고는 사람을 대하는 격이 달랐다. 단정하게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며 잘 정돈된 집안, 윤기 나는 화초, 책장에 가득한 여러 종류의 책들로 미루어 교양 있는 집안 같았다. 누군가 그랬다. “이런 집은 청소도 깨끗이 하고 신경 좀 써 주자.”라고 했다. 

  일이 끝난 후 경비에게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잘해 주더라고 했더니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와 친절이 몸에 밴 사람들이라고 했다. 경비원은 처음과 달리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공사 반장 아저씨가 팁을 준 효과인 듯했다. 묻지 않은 이야기도 먼저 꺼냈다. 이곳은 경비도 할 만하다고 했다. 봉급도 봉급이지만 팁이 제법 들어온단다. 404호 같은 술집 아가씨들은 밤늦게 남자 손님 데리고 올 때 모른 척하라며 팁을 넉넉히 준단다. 부자들이라 명절 때나 무슨 날이면 이것저것 챙겨주어 부수입이 쏠쏠하다며 자랑한다.     


  이 단지에서 가장 넓은 46평 공사를 시작했다. 여자 혼자 산다고 경비가 귀 띔 해 준 1004호 초인종을 누르자 긴 드레스 차림의 사십 대 초반 집주인이 들어오란다. 달콤한 쿠키와 커피를 내어오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하루에 얼마를 받느냐? 몇 시에 끝나느냐? 이야기가 끝이 없다. 학생인데 용돈 벌러 나왔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일하는 걸 지켜보고 있다가 간혹 어깨나 등에 손을 얻어가며 계속 말을 걸었다. “젊어서 그런지 어깨가 돌덩이네요.”라며 스스럼없이 스킨십은 했다. 혼자 살아 대화할 사람이 그리운 것 같았다. 장롱 뒤편 콘센트와 연결해야 하는데 장을 옮기는 것이 문제였다. 소목 장인이 만든 느티나무 고재 장롱이라 전문가가 아니면 옮길 수 없다고 했다. 소형아파트 한 채 값과 맞먹는다며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전문 업체에 맡기느라 이틀이 걸렸다. 마무리하고 나오려는데 “일 끝나고 집으로 와요. 미안해서 양주 대접할게요.”라며 이해 못 할 초청을 했다.      



  아파트에 산다고 모두 잘 사는 건 아니었다. 어느 한 집은 전기료, 가스비 등을 장기 체납하여 단전 조치당해 촛불 켜고 난로로 난방을 대신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집안은 엉망진창이라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곳도 여의도 아파트다.

  겉모습이 똑같은 아파트. 그 속에 사는 수백 세대의 삶은 각기 달랐다. 현관문을 나서면 아파트 사람이라 통틀어 불러지고 동일시된다. 미아리 산동네 사람도 여의도 아파트 사람도 집을 나서면 똑같은 서울 사람이 된다. 나도 서울 사람이란 이름으로 섞여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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