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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주 Jul 11. 2023

레드(Red)의 충격

'마크 로스코'는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마크 로스코’ 추상화의 세계를 찾아 원정에 나섰다. 우리가 타고 갈 MB호는 25인승으로 적당했다. 생존에 필요한 식수와 식량을 적재하고, 충분한 양의 산소공급이 가능한 외부 공기 유입장치도 설치돼 있다. 온도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냉난방 장치를 비롯하여 운행에 필수인 내비게이션 항법장치도 최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젊은 기장은 연료 보충을 마치고 먼 여행이 지루하지 않도록 승객의 취향을 고려한 음악과 영상도 준비했다. 완벽한 우리만의 공간이 확보된 거다. 


  승객은 남녀 혼합으로 구성되었다. MB호는 성별, 몸무게, 나이에 상관없이 동일 요금이 적용돼 선호하는 기종이다. 심지어 1인 특석과 3등 통로 간이좌석 요금이 같고, 신체적 특징을 고려하지 않고 좌석 배치를 무작위로 한다. 승객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기장의 서비스철학에 따라 그리 한다고 했다. 지정 좌석 없이 끼리끼리 짝을 지어 앉을 수 있고, 운항 도중 승인 없이 승객 간에 임의로 좌석 변경이 가능한 것도 장점이다.

  보안 관리도 철저했다. 사전에 승인된 승객 외에 추가 탑승은 불가했다. 내부에서 벌어지는 대화나 행동에 대한 녹음이나 촬영도 금지되고, 발언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치외법권적 지위가 승객에게 주어진다. 부담 없이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하면서 여행을 즐기면 된다. 여행을 끝내고 내리는 순간 추억만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탑승 규정 때문이기도 했다.      


  출발 한 시간 정도 지나자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최상급 식재료와 조리과정이 복잡해 1등 석에만 제공되었던 특식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겉은 검은 자주 또는 붉은 자주색을 띠고 바닷속 바위에 붙어 자라는 몸길이 삼십 센티 정도의 홍조류 보라털과(科)의 해조류를 밑에 깔고. 그 위에 오리농법으로 생산한 윤기 반짝이는 쌀밥을 얇게 펼친다. 달팽이 농법으로 지은 조선무에 신안 천일염으로 염장한 단무지, 살짝 데친 당근과 시금치를 길쭉하게 썰고 단백질 보충을 위해 제주 초지 방생 돼지고기로 만든 햄을 같은 길이로 썰어 밥 위에 펼친 다음 돌돌 말아 만든 거라 했다. 

 곁들인 음료는 제주 한라산 화산암층을 통과하며 자연 정수과정을 거쳐 바닷속 분출구에서 솟구치는 용천수로 생산한 생수 한 병이 제공되었다. 

  취식할 때 쇠붙이로 만든 도구를 사용해서는 안 되며 호숫가에서 10년 이상 자란 포플러로 만든 젓가락을 이용하거나, 엄지와 검지로 한 점씩 집어 흐트러지지 않도록 통째로 한입에 넣는 전통방식이 있다. 오늘은 문화 체험도 할 겸 손가락 방식으로 먹기로 했다. 

  후식 과일은 자연상태로 자란 풀을 베어다 작두로 잘라 쌀겨를 넣고 버무리듯 섞고, 쌀뜨물을 수시로 부어주며 삼 년 동안 발효시킨 천연퇴비로만 생산한 당도 15 브릭스 이상 유기농 딸기가 제공되었다.   

  

  기내식이 끝나자 기장이 영상 음악을 틀었다. 슈스케 스타 ‘박진언’이 등장하자 누군가 목소리를 높였다. 고음 올라갈 때 핏대 솟아오른 긴 목이 너무 섹시하다며 호들갑이다. 다른 승객이 질세라 섹시하면 ‘이서진’이라며 서로 양보 없는 섹시 설전이 벌어졌다. 여성과 남성, 나이별 대화 방식과 어울림에서 다름을 경험했다. 재치와 순발력 있는 언어선택과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젊은 승객의 발랄한 대화 방식은 여행의 맛을 더해주는 청량제다. 대화는 단순한 듯하면서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엉겅퀴 꽃같이 아름다움 속에 가시가 숨겨진 듯하고, 안개꽃같이 순진하듯 자화자찬을 늘어놓다 곤란한 부분은 여린 꽃대의 흔들림으로 슬며시 비켜 가는 대화를 음미하는 것도 재미있다. 

  대화의 주도층은 여성이다. 남성은 주로 창밖을 내다보며 관심 없는 듯한 표정이나 귀를 크게 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어쩌다 대화에 동참해도 단문 몇 마디로 끝이다. 여성과 다르게 과묵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수적으로 열세라, 표현력이 부족해서, 관심 없는 이야기라 그도 저도 아니라면 남자라는 자존감 때문에 분명한 이유는 없어 보인다. DNA가 다를 거란 생각으로 결론지었다.

  전시장은 다소 이른 시간인데도 태양은 작열했고 도시는 복잡했다. 계단 몇 개를 오르자 클래식 음악에 맞춰 야외분수 쇼가 펼쳐졌다. 우리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전시 첫 작품 <Magenta, Black, Green on Orange 1949>을 보는 순간 한 방 먹은 기분이다. 아무런 느낌도 와닿질 않았다. ‘마크 로스코’는 이런 작품으로 나를 시험하려 할까 궁금해졌다.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로스코는 ‘작품에 어떠한 설명을 달아서도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이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침묵이다.’라고 했단다.

  화가의 말을 따라 작품을 대할 때마다 싸움하는 자세로 침묵 속에 뚫어지게 보기만 했다. 추상화의 의미를 느껴보려 무진 애를 써 봤으나 허사다. 느낌이 없어 감각을 마비시킬 뿐이다. 

  다른 전시실에 들렀다. 온통 어둠이다. 넓은 벽면을 검정으로 칠하고 조명도 어둡다. 무제 회색 위에 검정(Black on Gray 1969-1970) 한 작품이 덩그러니 걸려있다. 작품의 어두운 분위기만큼이나 깊은 어둠에 사로잡혀 고요하고 불안하다. 누군가 정자세로 앉아 그림을 바라보다 흐느낀다. 마크 로스코가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 작품을 그릴 때 가진 것과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깊은 종교적 감흥에 심취된 듯하다.      

  마크 로스코의 마지막 작품 <Red/1969>가 내 기억에 자리 잡은 건 커다란 흰색 캔버스에 빨간색을 칠하다 마무리 못 한 듯 가늘게 남겨 놓은 흰 줄 몇 개다. 흰 줄 몇 개가 신경 쓰여 머릿속이 복잡하다. 갈라진 붓 탓에 캔버스를 파고들지 못했을까? 피와 혈관일까? 

  단순한 느낌에서 다른 생각으로 넘어간다. 피가 흥건하게 젓은 죽은 병사의 메리야스 모습이 상상되기도 한다. 의문투성이다. 로스코가 우울증과 동맥류로 시달리다 자살을 예견하고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칼로 그은 동맥에서 흘러나온 엄청난 피의 바다에서 죽음이 두려웠을 것이다. 몇 줄기 혈관을 흰색으로 남겨 놓아 생명을 유지하고 싶은 희망을 남겨두고 싶었던 건 아닐까? 마크 로스코의 ‘레드’를 본 느낌의 전부다.    

  

  전시회를 나오는 순간, 무언가 미심쩍고 찜찜하다.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로스코는 내 마음을, 아니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궁금증을 남겨 주었다. 감명을 받거나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해결하지 못한 난제를 갖고 돌아온 것만 갔다. 전시장 마지막 부분에 로스코의 말이 쓰여있다. 내 예술은 추상적이지 않다그것은 살아서 숨 쉰다.’   

   

  ‘레드’ 그래서 충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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