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서울을 향할 것 같았다.
철도여행의 묘미는 고속열차보다 좀 느리고, 덜컹대며 간이역까지 정차하는 완행열차가 제격이다. 통일호나 비둘기호 열차가 사라져 아쉽다.
장항선을 가장 느리게 운행하는 무궁화 열차에 올랐다. 전기를 이용한 고속열차가 경부선과 호남선을 달리고 있지만. 장항선은 충청도 사람들의 급하지 않은 품성처럼 느린 디젤기관차가 지금도 운행되고 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장항선의 종점이 장항읍에서 금강을 가로질러 익산역까지 연결되었다. 장항선이란 말이 무색하게 되었다. 출발도 KTX에 밀려 서울역이 아닌 용산역에서 한다. 열차가 영등포역을 지나 안양역을 통과할 즈음, 1965년 추억의 완행열차로 옮겨본다.
장항선은 대천 사람들에게 서울과 연결하는 유일한 철로다. 천안과 연결된 21번 국도가 있었으나 비포장도로에 장거리 버스노선이 없었다. 열차는 보는 것만으로도 서울을 향할 것 같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열차를 보기 위해서는 이십 리 길을 걸어 읍내까지 가야 했다. 하루에 서너 차례 다니는 열차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열차라 부르지 않고 기차라 불렀다. 디젤기관차로 교체되기 전 석탄 연료를 사용하던 증기기관차를 이르던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했다.
장날이면 읍내에 나가는 것이 제일 신나는 일이다. 열차도 보고, 짜장면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차를 기다리다 지루하면 철길 따라 하나, 둘, 셋…. 침목을 세며 걸었다. 수시로 열차 오는 소리를 확인하려 햇빛으로 달궈진 뜨거운 레일 위에 귀를 대었다. 먼 곳에서 움직이는 미세한 소리도 철로는 전해주었다. 철로가 전해주는 소리가 점점 커지면 먼 곳에서 기적 소리가 들렸다. 기적 소리를 출발신호 삼아 동네 아이들은 열차를 보려고 철길을 향해 달렸다. 지축을 흔드는 웅장한 소리, 철길 옆 코스모스가 꺾일 듯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검고 육중한 차체는 감동이었다.
열차는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점점 가늘어져 가는 철길 꼬리 끝으로 사라진 뒤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명절은 장항선에도 가장 힘든 시간이다. 서울살이에 지친 사람들이 일 년을 기다려 한꺼번에 몰려들기 때문이다. 시골 마을에는 한 집 걸러 한두 명은 돈을 벌겠다며 서울로 올라갔다. 그들은 청계천 골방 재봉틀 앞에서, 2교대로 힘든 구로공단 생산현장에서, 코에 염증이 생기는 도금공장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명절을 기다렸다.
명절 고향 가는 길을 귀성 전쟁이라 했다. 열차표를 사는 것부터 몇 시간씩 구불구불 수백 미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이곳저곳에서 새치기했다고 벌어지는 다툼은 지루함을 덜어주는 좋은 구경거리다. 군복 입은 경찰들은 긴 대나무 장대를 휘두르고, 호루라기 불며 질서유지에 안간힘이다. 다행히 입석 표라도 구하면 복권 당첨된 것처럼 행복해했다. 열차는 서울역에서 출발하기 전 이미 만원이다.
용산, 노량진, 영등포…. 내리는 사람은 없다. 밀고 당기며 열차에 타려는 아귀다툼은 월남패망 당시 마지막 철수 선박에 오르려는 피난민의 절규 그 자체다. 열차 창문으로 올라타는 사람, 계단에 겹겹이 매달려 가는 귀성객. 탈 수만 있다면 모든 행동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열차 내 화장실과 탑승구를 차지한 사람은 명당을 차지했다며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객차 지붕 위, 기관차 난간까지 위험도 불사했다.
객차 내부도 압사 직전이다. 좌석에 앉은 사람이나 통로에 서 있는 사람이나 한 뼘의 공간도 비워놓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움켜쥔 선물 보따리도 합세하여 찌그러지고 터져 비명횡사할 지경이다. 아수라장 속에서 객차통로를 오가는 초능력자도 있다. 홍익회 판매원이다. 사각 대나무 바구니에 구론산, 삶은 달걀, 도시락, 양갱 같은 것을 가득 담아 머리 위로 치켜들고 한 뼘의 여유도 없는 승객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평택역에 정차하면 어린이들이 맥주 캔에 물을 담아 열차 주변을 뛰어다니며 호객행위를 했다.
“시원한 히야시(일본어 차가운) 물 사세요.”
귀성열차가 고향 사람들 차지라면 피서 열차는 객지 사람들 차지다. 교통이 불편했던 동해안보다 장항선을 이용해 대천이나 만리포해수욕장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조개껍데기 백사장으로 유명한 대천 해수욕장은 최고의 피서지였다. 성수기 때는 하루에 2~30만 명이 찾을 정도니 피서 열차는 귀성열차를 방불케 했다. 피서객들은 별천지 사람 같았다. 배낭, 텐트, 수통, 항고, 야전삽 등 군용 야영 도구를 완벽히 갖추고 해수욕장을 찾았다. 열차를 구경하던 나는 부럽고 질투가 생겼다. 그 들을 놀래주고 싶었다.
서부 영화에서 말을 몰 때 사용하는 가죽 회초리 같은, 긴 아까시나무뿌리로 삼 미터 넘는 회초리를 만들었다. 열차 계단에 매달려 소리 지르며 즐거워하는 그들을 향해 회초리를 날렸다. 열차 속도에 의해 상당한 타격이 그들에게 가해졌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라 아파하는 모습이 통쾌했다. 몇 번은 재미있었으나 회초리에 감겨 사람이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회초리를 휘둘러도 그들에 대한 부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궁화호 열차는 어릴 적 피서객을 향해 아까시뿌리 회초리를 휘둘렀던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면 잠시 후 대천역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기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십 년 만에 찾아온 대천역은 무연탄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그 역사(驛舍)가 아니었다. 외곽으로 이전한 현대식 건물은 어릴 적 기차역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 수 없었다. 냉방 잘 된 대합실 의자에 앉아 1965년 명절을 떠올려 본다.
설 한 달 전 서울 간 형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부모님 일양만강하시 온지요?’로 시작되는 편지는 이번 설에 고향에 내려오겠다는 내용이다. 형 편지를 받은 어머니는 서둘러 명절준비를 시작한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아들이 항상 마음에 걸렸던 터라 내려오면 단단히 챙겨 먹일 요량이다. 간자미찜을 좋아한다며 내장 뺀 간자미 코를 끼워 말리고, 게장 담고, 돌아갈 때 삶아 보낸다며 달걀도 모아 놓는다. 아들 온다는 편지 한 통에 하루하루 시간은 부족했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설 하루 전날 어머니는 차례 준비보다 아들 맏이에 온 신경을 쓰는 눈치다. 몇 시에 도착할지 모르는 형 마중 나가라며 아침부터 성화다. 동생과 나는 이십 리 길을 걸어 읍내 역으로 나갔다. 열차를 볼 수 있고 형이 가지고 올 선물을 기대하니 신명이 났다.
대합실은 마중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열차가 도착하면 개찰구를 중심으로 귀빈 환영하듯 양쪽으로 늘어선다. 나오는 승객 중에 기다리는 사람을 놓칠세라 인상착의 하나 빼놓지 않고 매의 눈으로 한 명 한 명 세세하게 훑어본다.
몇몇은 기다리는 가족을 만나 얼싸안고 상봉의 기쁨을 만끽하나, 이번 열차에도 형은 오지 않았다. 두 시간 후에 도착하는 다음 열차를 기다려야 했다. 열차가 도착할 때마다 흩어졌다 모여들기를 몇 차례 반복하자 날이 어두웠다. 밤길을 걸어갈 걱정보다 형이 내려오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열차표를 구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어머니 심정으로 바뀌었다. 걱정만 할 뿐 연락 방법이 없으니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승객 맨 뒤쪽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형이 보였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오랜 기다림의 긴장과 걱정이 기쁨으로 바뀌며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손에는 선물 보따리로 보이는 커다란 분홍색 보자기와 알록달록 포장지로 싸인 선물세트,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들고 있었다. 뽀얀 얼굴이 형은 서울사람 같았다. 그런 형의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형은 시장에 들러 고기 몇 근과 아버지가 좋아하는 술을 한 병 샀다. 어머니는 어두운 밤인데도 마을 입구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형은 부모님께 절을 올리고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눈(雪) 모양이 그려진 하얀 설탕 봉지며, 처음 보는 과자가 가득 담긴 종합선물세트, 부모님 내복이며 우리 명절빔으로 사 온 알록달록 옷들을 꺼내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서울 생활의 고단함은 행복으로 변했다. 서울 이야기로 호롱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장항선은 지금도 꿈을 간직한 채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