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형수를 만나러 다녀왔다. 만남이라기보단 몇 수저의 식사를 먹여주고 싶은 간절함 때문에 간 거다.
도시형 여자였던 형수는 스물두 살 맏며느리로 우리 집안과 인연을 맺었다. 혼인 다음 해,형은 징집영장을 받고 입대를 했다. 홀로 남아 책임만 크고 권한은 없는 맏며느리의 책임을 떠안은 것이 첫 시련이었다. 삼시세끼 시부모, 어린 시동생들의 식사준비에 경험 없는 농사일, 쇠죽 끓여 먹이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육체적 고단함은 젊음으로 견딜 수 있으나 사랑채에서 새색시 홀로 흘리는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없는 외로움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행복이라면 일 년에 한 번 나오는 남편의 휴가 기간에 나눈 사랑이 유일했다.
삼 년 군 복무를 마친 형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서울로 떠났다. 첫째 둘째가 태어나 시가 식구에 자녀 양육까지 고난은 배가 되었다. 쉴 틈이라곤 어린 자식 젖 먹이는 순간이 전부였다. 끼니 때울 시간조차 줄이려 밥에 반찬을 쏟아 넣고 밥반찬을 동시에 욱여넣어야 했다.
시간에 쫓겨 서두르다 일이터졌다. 쇠죽 걸이 풀을 자르다 작두에 둘째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이 모든 걸 감수하며 형수는 맏며느리의 자리를 지켰다.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려 네 자녀를 잘 성장시켰고, 농사지을 땅도 만여 평 마련하여 마을에선 며느리 잘 들어와 부자 되었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다.
살 맛이 날 때쯤 형수는 삶에 기억을 조금씩 놓기 시작했다. 오 년 전부터 조금씩 이상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깜박깜박한다며 일상적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떤 땐 어제 먹은 식사 메뉴, 이웃과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단순한 일들이 반복되었다. 나이 먹어 그러려니 자가진단으로 지나쳤다.
어느 날엔 단어보다 “그거, 그거 있잖아”로 대신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이런 증상들이 기억을 지워버리는 과정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 년 전부터 형수는 외출을 꺼리기 시작했다. 약속 장소를 찾아가는 것부터 스스로 돌아올 자신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말을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말을 꺼내 웃음거리가 된 것이 걱정되기도 해서다. 그런 일이 반복됨을 인지한 탓인지(말하는 인지능력 저하가 온 것인지?) 형수는 일 년 전부터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실수해도 괜찮다며 위로에 말을 자주 했으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급격한 변화가 시작되면서 약물치료도 효과가 없어 보였다.
형수는 그동안 살아온 삶에 기억을 지우는 과정이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먼저 사람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 남편도 자식에게도 기억을 할애하지 않았다. 충격적인 사건 기억은 남겨 놓으려는 듯 잘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초점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반복되었다. 밥을 주면 농사일에 쫓기어 밥과 반찬을 한 그릇에 쏟아부어 먹던 기억이 남아있는 듯 밥과 모든 반찬을 한 그릇에 쏟아부어 놓는 일도 반복했다.
형수는 왜 이른 나이에 삶에 기억을 지워버렸을까! 도시의 화려한 생활에서 갑자기 빈농의 맏며느리로 살아야 했던 삶에 기억이 싫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무런 기억을 저장해 놓지 않았을 태어난 순간의 순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일까?
안타까운 마음에 형수 얼굴을 바라봤다. 초점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배시시 미소 짓는다. 행복한 표정이 보였다. 의사는 인지능력이 오 퍼센트 정도 남아있다고 했다. 형수는 남아있는 삶에 마지막 오 퍼센트 기억을 미소로 선택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