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우면서 따뜻한 프랑크푸르트 MAK 응용미술 박물관
혹자는 미니멀하고 지극히 합리적인 모더니즘 건축을 보고 비인간적이라고들 한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자연 친화적인 자재와 인간의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는 장식성에 '인간 본성에 가까운' 건축의 기준을 둔다면, 모더니즘 건축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규격화 된 콘크리트 건물, 철저히 배제된 장식 요소와 색채 등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건축의 특성은 일견 비인간적인 인상을 준다. 감상에 따라서는 단조롭고 차갑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 건축은 사실 인간이 도형과 대칭성에서 느끼는 추상적 미학, 그리고 더 나은 삶의 환경을 위해 고민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그 모더니즘의 비인간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 따뜻함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프랑크푸르트의 적용 미술 박물관(Museum Angewandte Kunst)은 차가우면서 동시에 따뜻한, 양가적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당최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건축에서는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는 패러독스이다.
Museum Angewandte Kunst, 약칭 MAK는 모더니즘에서 손꼽히는 거장 중 하나인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의 작품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MAK는 리처드 마이어의 대표작답게 그의 철저한 건축 원칙에 의해 지어졌다. 백색의 건축가란 별명에 걸맞게 고집스러운 흰색 외벽과 커다랗고 단순한 형태의 창, 평면 형태에서의 직선 요소 강조와 입체 공간에서의 곡선 차용을 통한 빛의 볼륨 강조 등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 특징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는 이 박물관 건물은 리처드 마이어식 모더니즘 미학의 정수를 드러내고 있다.
이전 문단이 담고 있는 내용을 한눈에 파악하기 조금 어려울 수 있다. 입구부터 하나씩 천천히 탐험해 나갈 것이니 너무 겁먹지 말자. 단 한 가지, 이 건물은 건축의 기하학적 요소를 강조한 모더니즘의 특징을 온몸으로 뽐내고 있단 사실만 알아두면 된다.
이 같은 특성은 색채를 최대한으로 절제한 백색 콘크리트 외벽, 그리고 장식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시킨 직선적인 디자인으로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 요소들은 모더니즘 미학에서 가장 크게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무채색과 비장식적 특성이 건축에서의 인간적인 풍요로움을 억제시킨다는 비판을 받곤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MAK를 바라보면, 과연 근거 없는 비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입구에서 바라본 박물관의 파사드는 흰색 사각형의 채움과 비움이 반복되는 단순한 형태이다.
앞서 언급했듯, 리처드 마이어는 흰색의 콘크리트 외벽을 고집한 건축가로 유명하다. 당장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들을 보아도 결벽적으로 새하얀 건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와 같은 흰색에의 집착은 모더니즘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사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흰색 외벽을 아주 좋아한다. 매끈하기만 한 흰색 외벽이 빛의 볼륨감을 담아내는 순간을 목격한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처드 마이어는 건축물에 있어서 빛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그가 흰색 외벽을 고집한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흰색은 빛의 명암을 드러내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색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빛의 색채 변화뿐만이 아니라 공간에 도달하는 빛의 양 차이도 공간 경험을 제공하는 도구가 된다.
따라서 MAK는 새벽빛에 푸르스름하게도, 기우는 노을빛에 따뜻한 빛으로도 물든다.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이 떠오른다. 두 작품 모두 형식은 다르지만 빛을 담아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각형이 중첩되는 기다란 회랑corridor으로 빨려 들어가면 절제된 분위기의 안뜰을 만나게 된다. 안뜰은 푸릇한 화초 대신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 몇 그루와 우물뿐이다. 우물 역시 흰색의 곡선 오브제로 둘러싸여 있다.
여기서도 리처드 마이어 건축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커다란 사각형 창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안뜰을 조망한다. 건축가가 채광을 아주 중요시했기에 이렇게 큰 창을 채택한 것이다. 다만 이렇게 커다란 창이 난 공간은 대부분이 복도다. 전시 공간을 서로 잇는 복도는 시원한 개방감을 주어 다음 전시로의 동선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전시 공간에서는 오롯이 전시에 집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면으로 읽히는 외벽에서 창의 볼륨은 미묘하다. 리듬감을 줄 만큼 작고 충분히 반복적이지도, 격자감을 강조할 만큼 크고 일정하지도 않다. 아래로 갈수록 개구부가 세로로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미묘한 볼륨의 창은 건물을 투명해 보이게 한다. 리처드 마이어의 MAK에서 차가움이 발견되는 부분이다.
투명성은 차가움을 내포한다. 유리, 크리스탈, 얼음 등 투명한 재질에서 차가운 감촉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처드 마이어는 이러한 투명성을 가지고 따뜻함을 표현해 낸다. MAK 탐험을 끝까지 함께하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차가움 속에서 따뜻함을 발견하는 여정을 위해 본격적인 박물관 출입구로 향해보자.
제한적으로 곡선을 사용하는 것 역시 리처드 마이어가 즐겨 사용하던 건축 원칙이었다. MAK에서는 출입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평면상에서 직선의 벽과 곡선의 벽을 중첩시켜 공간을 구성하는 특유의 방법이다.
흰색의 곡선 벽은 빛을 '담아낸다'는 표현이 아주 적절하게 느껴지는 요소다. 커브를 따라 발생하는 명암의 차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빛에 '볼륨감'을 부여한다. 이 차이를 한번 목격하고 나면, 앞으로 일상적으로 지나치던 단순한 벽도 풍요로운 감상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단조롭던 일상의 공간이 영감과 감상으로 넘치게 되는 과정이 바로 건축 답사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입구로 들어서서 박물관 표를 끊고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박물관의 핵심 동선인 경사로가 자리하고 있다. 이 경사로는 박물관 복수의 층을 하나로 연결하는 거대한 수직 공간이다.
앞서 소개했던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 경사로가 램프ramp의 사선을 이용해 빛을 조절했다면, MAK의 램프 공간은 시원시원한 개방감이 눈에 띈다. 1층 시작부에서부터 최상층까지 이어지는 램프의 바닥면이 중첩되어 보이기 때문에 사용자는 단박에 건물 전체의 스케일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전시 동선의 개방감은 건물 전체에서 일관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특성으로, 램프 공간 역시 예외가 아니다. 폐쇄적인 전시 공간과 대비되는 개방적이고 밝은 복도 공간은 공간 분위기를 계속해서 환기시켜주고 두 공간을 확실히 구분 짓기 때문에 사용자가 전시 공간에서는 오롯이 전시 내용에만 집중하면서도 답답함을 느끼지 않고 예술적 산책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해 준다.
램프를 통해 2층으로 올라오자마자 마주친 공간은 바로 적용미술 박물관답게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산업 디자인 작품을 한 곳에 모아둔 전시관이었다. 20세기의 건축가들은 가구, 특히 의자 디자인에도 흥미가 아주 많았다. 책과 인터넷 자료로만 보던 거장들의 값비싼 가구 작품들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사용하기 까지! 전시 내용에 대해서는 어떤 사전 정보나 기대도 없었던 만큼 배로 감격스러운 발견이었다.
찰스 매킨토시의 힐하우스 체어와 르 코르뷔지에의 LC2 암체어를 한 컷에 담아내고, LC4 셰즈 롱에 몸을 누인 채 마인 강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는 정말이지 흔치 않으니 꼭 방문해 귀한 시간 보내며 추상적인 모더니즘 디자인을 감상하길 바란다. 전시장에는 물론 박물관의 건축가인 리처드 마이어의 오브제도 있다.
한 점에 몇백, 몇천만 원씩 하는 몸값 비싼 작품들을 뒤로하고 전시 관람을 계속한다. MAK는 사실 한국어로는 프랑크푸르트 수공예 박물관으로 주로 일컬어지지만, 응용미술 박물관에 가깝다. 때문에 전시품은 의자나 조명기기 같이 보편적인 산업 디자인 작품은 물론 동양의 도자기, 기와에서부터 사진, 영상, 직물, 전자기기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개인에 따라서는 고전 회화 미술관보다 흥미로울 수 있을 좋은 큐레이팅이었다.
이윽고 램프를 통해 천천히 걸으며 박물관의 최상층으로 향한다. 램프가 꺾이는 부분은 마인 강변을 한눈에 조망 가능하게끔 시원한 통창이 뚫려 있다. 강 건너편으로 하이테크 건축의 독보적인 거장, 노만 포스터의 초고층 빌딩 코메르츠방크 타워(Commerzbank Tower)가 땅거미로 물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정말이지 풍요로운 도시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코메르츠방크 타워는 2016년 매각되어 삼성생명 소유의 빌딩이다.
드디어 다다른 최상층은 아트리움으로 되어 건물에서 가장 채광량이 많은 공간이다. 오늘날의 아트리움이란 유리 천장으로 덮인 실내공간을 뜻한다. 오후 3시 반, 일찍이 저물어가는 독일의 노을빛과 맞물린 아트리움 공간이 절묘한 조화를 자아낸다.
공간의 한가운데 가만히 서서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아본다. 가장 맑고 투명한 램프 공간에서부터 아트리움으로 넘어오는 따뜻한 햇빛과 직사 된 저녁놀이 가장 길게 늘어지다가 채광량이 서서히 잦아드는 복도를 지나 빛이 차단된 전시 공간까지.
빛을 360도로 그라데이션 한 것만 같다. 빛이 길게 늘어지는 타이밍의 발견은 감동을 배가시킨다. 시간에 따른 빛의 변화 속에서 마주친 절묘한 순간은 역시 공간 경험의 묘미를 더해주는 요소다.
흰 벽과 창, 이토록 절제된 건축 요소를 가지고 빛을 온 공간으로 느끼는 경험은 가히 감격 그 자체이다. 단순한 요소뿐이던 공간(空間)이 생동감 있는 빛으로 가득 찬다. 빛이 나를 에워싸는 기분과 함께 따듯한 감상이 든다. 빛은 따스함을 내포한다.
빛은 생명의 기원이다. 인간이 빛의 표현에 집착하는 이유가 아닐까. 또한 그게 바로 프랑크푸르트 MAK에서 차갑게만 느껴지던 콘크리트 건축, 비인간적인 모더니즘 건축이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차는 양가적 감상의 순간을 느낄 수 있는 이유이다.
모네가 루앙 대성당의 미색 벽에서 오색찬란한 빛을 보았듯, 앞으로는 우리도 흰색 콘크리트 벽에서 다양한 온도의 빛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