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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과 팔뚝으로 이사하기

비건 셰어하우스 만들기 12화

by 현주

이사를 앞두고 저는 두 가지가 없었어요 - 돈, 그리고 경험

그리고 두 가지는 넘쳐났습니다 - 시간, 그리고 팔뚝

그래서 결심했어요. 비건 셰어하우스를, 당근 하나 들고 만들어보기로요.


돈이 없어도 궁상은 부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선택한 건, 중고의 우아함이었죠. 환경도 지키고, 지갑도 지키고, 감성까지 챙기려 했는데, 여기에 이웃들의 이야기까지 담았습니다.



+(중간 광고) 이제, 유튜브에서도 만나요 :)

https://youtu.be/NQVUrRZQSXA?si=alIJDvG7U4aeBeJ8




새하얗게 질린 원목 식탁

몰딩과 어울리는 식탁이 필요했는데, 마침 원목 식탁이 눈에 띄었어요. 이사 날, 은평에서 고양까지 가 용달차에 실어 왔죠. 비누 공방에서 쓰던 거라 새것처럼 깨끗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컵자국과 긁힌 자국 2군데만 흐린 눈 하면 부드러운 나무색에 눈을 뗄 수 없는 친구입니다.


문제는 관리였어요. 이삿짐 비닐을 잠시 올려뒀었는데. 비닐에 썼던 매직이 식탁에 찰싹 옮겨 붙은 뒤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거 있죠ㅠㅠ 친구가 놀러 와 전골을 해 먹은 날에는 냄비받침이 없어 행주를 깔았다가 그만.. 식탁이 새하얗게 질렸습니다.


흔적을 볼 때마다 지난날의 추억에 잠기곤 합니다. 한편으로는 공방 사장님이 깨끗하게 썼다고 뿌듯해하셨는데.. 제가 더 더럽혔네요 하하.

IMG_5037.jpg 시꺼멓기도 새하얗기도 한 원목 책상 ㅠㅠ 그건 그렇고.. 어제 동거인이 방아 된장찌개랑 도토리묵, 포항초 시금치 무침을 해줬는데 너무 맛있었어요!!!!!


무선 청소기 판매자와 드라이브

가장 기억에 남는 거래예요. 청소기만큼은 좋은 걸 사용하고 싶었거든요. 당근에 올라와있는 청소기 중 차이슨, 다이슨만큼 많은 게 'LG코드제로 A9' 시리즈였습니다. 20만 원에 올라와있는 매물을 '오늘 거래할 테니 15만 원에 해달라'라고 하였고, 판매자님은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날은 비가 왔습니다. 공덕역에서 판매자 부부가 저를 보고는 당황해하셨어요. 무방비 상태로 노출 중인 무선 청소기와 함께요. 판매글에 가방이 있어서 청소기를 그 안에 넣어주시겠거니 했는데. 청소 키트로 가득 차있고, 청소기는 따로 들고 가야 하더라고요. 저는 맨손으로 털레털레 갔는데. 비도 오고 하니 태워주겠다며 네비를 찍었는데. 차를 타고 가는 망원동은 생각보다 거리가 있었습니다. 중간에 지하철역에 내려주셔도 된다고 했는데도 근처까지 태워 주셨어요. 좋은 동네로 이사 갔으니 잘 될 거라는 덕담과 함께요.


두 분의 호의가 없었다면 혼자 낑낑 이고 지고 갔을 걸 생각하니(그것도 비를 맞으며!) 인류애가 충전되었습니다. 평일에, 그것도 밤 9시에 직장인이라면 귀한 휴식 시간일 텐데, 거기다 가격을 깎은 구매자에게 흔쾌히 내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날 느꼈습니다. 없는 살림이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든다는 걸요.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엔 늘 누군가의 온기가 함께 있었습니다.




예쁘고 비싼 접시를 헐값에!

주방 기물이나 접시도 당근으로 많이 구매했어요. 동거인이 요리를 좋아해 제대로 뽕을 뽑고 있습니다. 특히 기물 정리하는 카페에서 얻어온 볼앤볼 파스타접시는 만능입니다. 파스타, 오픈샌드위치 등 한 가지 메뉴 담기에도 좋고, 한식 먹을 때처럼 여러 가지 반찬을 덜어 원플레이트로 먹기에도 좋아요.


만약 카페가 많은 동네에 사신다면 꼭! 매물을 살펴보세요. 비싸고 예쁜 접시를 한 장당 5천 원~1만 원에도 구할 수 있어요.


그런데 스텐 프라이팬은 기름을 한 번 쓰면 설거지하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얼른 코팅팬은 새것으로 장만해야 하는데. 이렇게 구매 목록이 하나씩 늘어만 갑니다.


IMG_4937.JPG 가장 앞쪽에 있는 흰 접시는 이케아, 뒤쪽에 있는 조금 더 둥근 접시 두 개는 볼앤볼 파스타 접시입니다. 모두 당근으로 구했어요. 그리고 음식도 모두 동거인이 만들었어요 후후



브리타 정수기는 대용량도 있어요

이사하고 급했던 것 중 하나가 정수기입니다. 저희는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기 때문에 생수를 사 먹고 싶지는 않았어요. 페트병이 아무리 재활용이 된다고는 해도.. 실제로 식품용기, 페트병 등 고품질로 재활용이 되는 비율은 15%에 불과하다고 해요. 미세플라스틱도 걱정되고요. 렌탈 정수기나 언더싱크 정수기는 비용적인 측면에서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래, 제로웨이스트 지향하는 집에 걸맞게 브리타를 써보자! 싶어서 플로우를 당근에서 구했는데요. 가장 흔한 마렐라(2-3L) 사이즈와 다르게 플로우(8L)는 정수 속도가 빨라서 아주 만족해하며 쓰고 있습니다. 용량도 넉넉하니, 제가 아무리 물먹는 하마여도 이틀에 한 번 꼴로 물 채워주면 되고요.


정품 필터는 매번 새 걸 사서 써야 해 플라스틱이 발생하는데, 국내 기업이 만드는 도토리 필터는 내장된 필터 주머니만 교체하면 되어서 훨씬 친환경적입니다. 가격도 더 저렴하기도 하고요. 저희는 동네 제로웨이스트샵인 알맹상점에서 구매해서 쓸 예정이지만,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나 쿠팡에서도 판매하고 있답니다.


IMG_4105.jpg 우리 집 정수기, 예쁘죠?



이사는 체력보다 우정과 인내로

이삿날에는 용달 이사를 이용했어요. 짐이 적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이사하러 가는 길에 픽업하는 당근 가구가 무려 세 점이나 되는데, 이걸 생각을 못했던 거예요!


500L 냉장고를 계단으로 옮겼어요. 사다리차를 안 부른 걸 후회했죠(그랬다면 30분이나 일찍 끝났을 텐데!). 기사님은 남자 한 명이 더 있어야 옮겨줄 수 있다고 내내 말씀하셨지만, 결국에는 기사님과 여자 두 명이서 냉장고를 무사히 옮겼답니다. 덕분에 배웠어요. 이사는 체력보다 우정과 인내로 하는 일이라는 걸.





없는 살림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품어준다

이번 이사를 통해 깨달았어요.

그 이야기들은, 많이 번거롭고 귀찮고 가끔은 아프기도 하지만 자주 웃음을 줬어요.

결국은 제 삶을 조금 더 단단하게, 다정하게 만들어줬습니다.





그런데요.. 세탁기랑 건조기만큼은 새 걸로 샀습니다. 그것도 신혼 대표 가전인 LG 트롬 오브제컬렉션 25kg, 20kg짜리로요. 이불 빨러 세탁방 다니는 삶을 청산했습니다! 그 시간에 글을 쓰고, 차를 끓이고, 햇살을 즐깁니다.


백수라면서, 어떻게 비싼 세탁기를 샀냐고요? 다음 화에서 그 무모하고 기특한 소비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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