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너무 오래도 함께했던 분이 곁을 떠났다.
코로나라는 핑계아닌 핑계로
몸이 아프신 분을 몇달동안 한번을 보러 가지 않았었다.
내가 어렸을때 우리집이 있는 동네에 오실 때면
늘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밤맛 모나카를
많이도 아니고 두세개씩 사서
주머니에 넣어오시던 분이었다.
전화해서 잠시 아파트 앞으로 나오라고 하시고는
매번 그 모나카를,
어떨 때는 지하철역 앞에서 팔던 옥수수를,
또 어떨 때는 작은 용돈을 손에 쥐어주셨다.
그 돈을 보고 누가 훔쳐갈까봐
돈이 보이지 않게
댁에서 돈을 휴지에 돌돌 말아서 가져와서는
재빨리 내 주머니에 넣어주던 그런 분이었다.
나는 태어나기도 전,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사회에 만연하던 때,
가족들에게 크고작은 실수들을 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이랑 있으면 분위기가 묘한 게
어린 내 눈에도 보였다.
어린 마음에 그걸 이해하기 전에 판단해버렸다.
가끔 전화를 못본체하기도 했고
나를 예뻐하는 그 손길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죄책감은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몇 년이 흐르고 어느 날, 돌아가셨다.
회사에서 전화를 받고서는 잠시 멍해졌다.
그 감정이 뭔지도 모른 채 일단 장례식장에 갔다.
몇달동안 몸이 아프셨던 탓인지
어른들은 예상했다는 듯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다.
마주앉아 웃기도 했다.
얼떨결에 입관을 보러 따라갔는데,
그제서야 실감이 조금 났다.
그렇게나 약하셨던 몸이 너무 딱딱했다.
차가웠고, 이상했다. 무서웠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하라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죄송하다고 해버렸다.
그 죽음을 너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게 너무 죄송했다.
마지막 발인 날이 되었고, 이른 아침 이동했다.
화장터에서는 화장을 다 하고 나서
한 줌의 재로 남은 마지막 모습을 봤다.
아득해졌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나 한순간이라는게
소름이 돋게 무서웠다.
몇십년을 고개숙이지 않는 어른으로 살다가
결국은 작고 까맣게 타버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 작디 작은 마지막 모습을 보고도
이상하리만치 아무도 울지 않아서,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혼자 숨죽여 한참을 울었다.
아무도 울지 않는 게 나를 더 울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냥 장례가 끝이 났다.
오랜만에 본 친척들은
병원 지하주차장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그냥, 끝이었다.
장례가 끝나고 나서는
누가 조의금을 얼마를 했고, 꽃을 보냈고
그래서 누구한테 답례차 밥을 사야하네
선물을 줘야하네 하는 그런 공식적인 절차가 오갔다.
무서우리만치 차갑고 정확한
그들만의 규칙와 예절이 있었다.
다만 그 가운데
죽은 이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없었다.
덧없다는 말이 조금은 피부로 느껴졌다.
이미 죽음 이후의 남은 자들의 일이라는 건
슬픔보다는 계산에 가까워보여서
그게 참 정없고 어색하고 못나보였다.
철이 없다고 이야기하는게 맞으려나.
아직은 죽음이라는 말이 어색한 나이다.
발인을 하던 날만 해도 후유증이 한참을 갈 줄 알았는데,
죽음은 너무 빨리 익숙해져버렸다.
며칠이 지나고 나니 내 삶을 살아내기 바빴고,
이미 몇달동안 안보고 지냈던 할아버지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가끔 아직도 파는 모나카를 볼 때면,
할아버지댁에 늘 걸려있던 우리의 어릴 적 사진을 볼 때면
잠깐씩 생각은 났지만 그렇게 끝이었다.
죽음이 너무 무섭다.
잊혀진다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두렵다.
죽음을, 사랑을, 외로움과 행복을,
그 모든 감정과 사람을 잊고싶지 않아서
자꾸만 짧은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