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Original <페르소나> - 밤을 걷다
(영화 내용에 대한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내가 찜해 놓은 콘텐츠 목록을 뒤적이다가
예전에 봤던 <페르소나>라는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개봉했던 <페르소나>.
4명의 감독이 이지은이라는 한 인물의 페르소나를
각자의 시선으로 풀어낸 4편의 단편영화이다.
오랜만에 포스터를 보자마자 단번에 떠오른 건 그 4편 중 마지막인 <밤을 걷다>였다.
처음 그 편을 보고 나서, 그 20분짜리 단편영화 한 편을
서너번 돌려봤던 기억이 있다.
적절한 분위기에 인상깊은 대사들이 많았다.
조용한 밤거리에서 산책을 하는
두 남녀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
죽은 여자가 남자의 꿈에 등장해
잔잔히 주고받는 이야기로 작품이 전개된다.
대화를 하다 주저 앉아 엉엉 울기도,
언성을 높이기도 하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내내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말은 왠지 모르게
너무나 따뜻했고 깊이가 깊었다.
"점점 미끄러지는 기분으로 사라지고 있어서 좀 슬퍼.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사라져버리기 전에 너를 찾아오고 싶었어."
여자와 남자는 예전에 함께 갔던 한 골목을 걷는다.
와인집, 돌담 앞 자리, 건너편에 앉아있던 사람들,
가게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풀벌레소리가 들리던 여름밤이었고,
둘은 그 밤을 추억했다.
그때의 기억을 되짚으며
잔잔히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여자가 묻는다.
‘내가 왜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리고는 ‘왜 죽었어?’ 라는 남자의 질문에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외로웠어. 끝이 없이, 끝이 보이지 않게.
나를 아는 사람이 있고 나를 모르는 사람이 있어.
나를 아는 사람 중에는 네가 있었고
너 외의 다른 사람들이 있었어.
나는 너 외의 다른 사람들한테 외로움을 느꼈어.
너를 제외한 그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들에
외로움을 느꼈어.
네가 항상 옆에 있어 줬는데 부질없이 괴로워했네.
죽을 때까지."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왜 그런 마음이었던 건지 알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녀의 모든 말은 참 공감이 됐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들의 말과 시선에 동요한다.
나를 조건없이 바라보고 사랑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편에는 날카로운 시선과 말로
기어이 생채기를 남기고야 마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인터넷과 익명에 힘입은 가십으로,
이게 다 네가 잘하길 바라는 마음이라는
윗사람의 변명으로,
때로는 그조차도 없는 비난으로, 또 때로는 침묵으로.
그런 남의 말에 흔들리면 안된다. 그래, 말은 쉽다.
하지만 실제로 그 모든 시선과 생각을 못본 체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이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탓하고 밀어내기도 한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무너져버리고 말기도 한다.
작품 초반부 언니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절대로 죽을 때 입을 벌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어.
죽을 땐 죽음을 받아들이는 걸로 삶에 저항하겠다,
그렇게 생각한 거지."
여자는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했다고 이야기한다.
안간힘으로 마지막 숨을 쉬고 싶어서 입을 벌린 채 세상을 떠났던 언니의 모습이 싫어서,
떨어진 후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온 힘을 다해
입을 다물었다는 여자.
김종관 감독은 영화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지은 배우에게 차분함과 나른함,
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쓸쓸함이 보였어요.
이 점을 작품에 녹이고 싶었고, 연인의 이야기지만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서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위로와 즐거움을 주는
영화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독의 말대로 차분하고 단단해보이는 여자의 모습.
하지만 결국 여자는 외로움에 죽음을 선택했고,
잊혀지지 않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남자의 꿈에 등장했다.
남자는 그럼 꿈에서 깨면
이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거 아니나며
여자를, 꿈에 등장했던 그녀를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녀의 죽음이 자기 탓이 아님을 알고는
그걸 잊지 않으려고 계속 혼잣말을 되뇌인다.
사회가 만들어낸 외로움이 여자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여자는 그 죽음 이후 잊혀짐에 두려워하고 있고,
남자는 홀로 남아 슬퍼하고 있다.
잊혀지지 않으려고, 함께했던 그 밤을 잊지 않으려고
여자가 선택한 건 남자의 꿈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깨고 나면 잊혀지고야 말 꿈이었다.
"꿈도 죽음도 정처가 없네. 가는 데 없이 잊혀질거야.
우리는 여기에 있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다 사라지고 밤 뿐이네. 안녕."
https://www.youtube.com/watch?v=rQ5eOgT56ow
민서 - '사랑의 기쁨'
영화 속 여름밤을 회상하는 장면에 흘러나오던 노래.
[가사]
조용히 걷던 밤 느리게 흘러간 말
비밀을 건네던 밤은 잊혀졌네
이별의 시간이 지나고 먼 어느날
우리는 끝없이 서로가 그리워
마음을 가리고 추억을 감추지만
기억은 남았고 아픔은 지울 수 없네
흩어진 시간들 그늘에 숨어든 맘
우리가 거닐던 길은 잊혀졌네
그립던 얼굴이 눈 앞에서 웃지만
오래전 사라진 밤의 환상일 뿐
마음을 가리고 추억을 감추지만
기억은 남았고 아픔은 지울 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