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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운 Feb 14. 2022

공상연애소설가 홍지운입니다.

공상연애소설이 뭐냐면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공상과학소설을 읽으며 언젠가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재미없는 첫 문장을 써버렸군요. 하지만 이 문장은 제 동료 작가들이나 관계자들이 보면 펄쩍 뛰어올라 비명을 지를 내용이랍니다. "공상과학소설이라니! 감히 저주받은 이 단어를 입에 담은 저 자의 신간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옆에 꽂아라!"라면서요.


    요즘과는 달리, 한국출판시장에서 SF에 대한 취급은 무시를 하거나 놀림감의 대상으로 삼거나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제가 SF를 쓴다고 했을 때 저의 지도교수님이나 지망생 동료들은 시장도 작고 의미도 없는 작업에 왜 집중을 하느냐고 했었지요. 가끔 언론에서 SF작가나 작품을 소개할 때도, '공상과학소설의 불모지인 한국시장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작가'나 '이 작품은 평범한 공상과학소설이 아니라 보다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SF를 얕잡아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지요.


    이런 상황이었다 보니, 그 시절의 SF작가와 팬덤 내부에서는 SF의 위치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홀로 고군분투'라니. 자기 스스로를 부각하기 위해 SF를 쓰자면서 의기투합해 서로를 독려했던 동료들의 존재를 지우는 이야기잖습니까. '평범한 공상과학소설이 아니라'니. SF는 깊이 있는 주제를 담을 수 없다는 편견을 전제하고 있지 않습니까. 


    SF의 패러다임을 보다 전문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조정하기 위해, 그 시절의 SF작가와 팬덤 내부에서는 용어부터 고치고자 했습니다. SF를 공상과학으로 번역하지 말자는 운동이 바로 그 움직임이 구체화된 것이었습니다. 공상이라는 단어를 네이버 사전에서 검색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봄. 또는 그런 생각." 하지만 SF가 과연 현실적이지 못한가? 실현될 가망이 없는 이야기만을 담는가? 우리가 좋아하는 작품들이 허무맹랑할 뿐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상과학소설에서 공상이라는 단어를 축출하고, 과학소설만을 남기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제가 위에서 쓴 첫 문장에 대해 "공상과학소설이라니! 감히 저주받은 이 단어를 입에 담은 저 자의 신간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옆에 꽂아라!"라는 반응을 예상하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랍니다. 공상과학소설에서 과학소설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끈 사람들에게, 공상과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전환에 저항하거나 전환 자체를 감지하지조차 못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일 테니까요. 


    분명 저는 이 움직임이 필요하고 또 유의미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패러다임의 이동에서 배제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저 같은 사람 말이지요. 그러니까, '어린 시절부터 공상과학소설을 읽으며 언젠가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사람들이요. 현실적이지 못하고 실현될 가망이 없는 이야기를 좋아했고, 허무맹랑한 전개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응원하는 한 편으로, 약간의 소외감이 느껴지더라고요. 예전에 많은 분들이 "아니, SF가 뭐가 어때서!"라고 화를 내셨던 것과 비슷하게, "아니, 공상이 뭐가 어때서!"의 심정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허무맹랑한 이야기. 좋지 않나요? 굳이 과학적으로 엄밀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개연성이 없는 전개가 나오더라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재미난 이야기들이 있지 않던가요? '어디로든 문'에 대해 엄밀한 해석이 없어도 <도라에몽>은 누구에게나 명작이고, '무한불가능확률추진기'처럼 오히려 비과학적이고 반논리적인 설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점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매력 아니던가요? 우리는 항상 마음껏 공상을 펼쳐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건 아무렇게나 달려가는 작품들을 사랑하지 않았던가요?


    이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SF는 더이상 어디에서도 불모지 소리를 듣지 않고, 소설에서 영화 그리고 게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문화 컨텐츠 사업에서 빼어난 성과를 달성하고 있습니다. SF가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경우는, 글쎄요. 아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예전과는 달리 보다 편하게 반론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다 편한 마음으로, 이제 '공상'에 대한 복권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물론 간신히 '공상과학소설'에서 '공상'을 떼낸 사람들이 있는데, 그분들 앞에서 다시 '공상'이라는 두 글자를 달아놓아서야 심보가 좀 고약한 일이겠지요. '공상과학소설'이 '공상소설'과 '과학소설'을 합친 폭넓은 개념이라는 식으로, 제가 쓰는 소설이 '공상소설'이라 주장해볼까도 했지만, 이도 심심한 전략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고른 선택지는, 네. 그렇습니다. 제목에 적은 그대로 '공상연애소설'입니다.


    공상과 과학은 여러모로 서로 충돌하는 개념인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터입니다. 사실 저는 두 개념이 충돌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매력적이라 생각하지만, 이 탓에 엄밀한 개념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 하는 분들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반대로 공상과 연애는 제법 잘 어울리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보는 연애는,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경험했던 일이지 않던가요? 그리고 그 가망이 없고 막연하기만 했던 바람이 현실로 실현되는 순간의 짜릿함은, 누구나 꿈꾸던 무엇이 아니던가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고 또 만들고 싶어하는 저는, 저 스스로를 '공상연애소설'을 쓰는 '공상연애소설가'로 규정하고자 합니다.


    제가 떠올렸지만 이렇게 저에게 잘 어울리는 선택지도 없는 것 같아요. 저의 소설 내용을 생각해 보면 또 어떻게 된 게 하나같이 공상과 연애로 가득하거든요. "방사능에 오염된 개저씨에게 물린 나머지 술만 마시면 슈퍼 개저씨가 되는 여성과 사랑에 빠진 주인공"이나 "용을 납치한 공주의 후예로, 흥분하면 콧김에서 불이 뿜어져 나와 짝사랑 상대에게 화상을 입히고 만 주인공"이나 "남극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냉면을 끓여주는 주인공"이 나오니, 이정도면 제법 잘 맞는 옷을 찾은 셈이지요. 


    네, 저는 공상연애소설가 홍지운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공상과학소설을 읽으며 언젠가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마침내 꿈을 이뤄 작가가 되었고, 대부분은 SF를, 가끔은 호러나 미스테리를, 그리고 요즘에는 공상연애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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