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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슨생 Oct 15. 2024

안정한 물질로 이뤄진 불안정한 마음

복직 이후 느낀 불편함

휴직하고 돌아오니 정말 꿔다 놓은 보릿자루 모양새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휴직 기간에는 미처 인지하지는 못하였는데 복직하고 나서야 깨닫게 된 두 가지의 소중함이 있다.


적당한 익명성의 보장.

그리고 견딜 수 있을 정도의 피곤함.


  9월 중순임에도 여전히 찌는 듯한 한여름 날씨 때문에 땀 분비샘이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는 것은 힘들지만 분명 가을은 가을이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던 시점이 9월 중순이었다. 이런저런 핑계로 글쓰기를 미루다가 10월에서야 다시 쓴다.)


마음에 고독과 평화와 심오함 그리고 낭만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외부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어도 심적으로 크게 동요되지 않음을 느끼고 있다. 마치 불포화 탄화수소에서 포화 탄화수소로 변화되었다고나 할까?



  유기체를 이루는 구성 물질 중에서 탄소와 수소만으로 이뤄진 분자를 탄화수소라 한다. 탄소 한 개가 네 개의 수소와 결합하여 만들어진(메테인) 탄화수소도 있지만 여러 개의 탄소가 전자를 서로 공유하며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형성된 탄화수소도 존재한다.

탄소는 네 개의 화학결합이 가능…근데 오늘 이야기는 이게 결론이 아니다.

  탄소와 탄소 사이 전자를 한 쌍 공유하여 화학 결합을 한 경우, 탄소 사이에 단일 결합(single bond)이 이뤄졌다고 한다. 두 명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왼쪽 사람이 오른쪽 손을 내밀고, 오른쪽 사람이 왼쪽 손을 내밀어 서로 맞잡은 상황과 비슷하다. 여기서 왼쪽 사람이 왼손을 들고 오른쪽 사람이 오른손을 들어 서로 마주 본 다음, 하이 파이브 하듯 손바닥을 붙였다고 하자. 이는 탄소와 탄소 사이 이중 결합(double bond)을 한 것과 유사하다.

단일 결합 보다는 이중, 삼중 결힙이 더 불안정하다.

 두 사람이 서로 악수하듯 손을 잡는 것보다 하이 파이브 한 상태에서 손바닥을 붙인 것이 더욱 떨어지기가 쉽다. 탄소 사이 단일 결합 이후 추가로 형성된 이중 결합도 마찬가지다. 추가로 형성된 결합은 결합력이 약하여 외부 조건에 의해 쉽게 떨어져 다른 물질과 반응하기 쉽다.

 

 탄소 사이의 이중 결합이 끊어지고 다른 원자(또는 원자 집단)가 탄소와 새롭게 결합하는 반응을 유기화학에서는 첨가반응(addition)이라 한다. 앞서 말한 비유에 따르면 첨가반응은 한 손은 악수하듯 잡고, 한 손은 하이 파이브를 하며 마주 보던 두 사람이 각자 하이 파이브 하던 손을 떼고 다른 물건을 집어 드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탄소 사이에서 삼중 결합(triple bond)이 일어난 경우에도 탄소와 탄소 간 약하게 결합한 부분이 존재하므로 외부 물질을 만나면 첨가반응이 쉽게 일어난다.

첨가번응의 예시. 요상하다싶은 분들은 그냥 불안정한 덩어리가 안정화 되기 위해 화학변화가 쉽게 일어나는거라 생각하시길

  탄소와 탄소 원자 사이가 오직 단일 결합만으로 이뤄진 탄화수소를 포화 탄화수소라고도 한다. 탄소는 다른 원자 네 개와 화학결합이 가능한데, 이 네 개의 결합이 단일 결합으로 모두 점유되어 있으면 더 이상 다른 원자와는 결합을 할 수 없기에 ‘포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반면, 이중 결합 및 삼중 결합이 있는 탄화수소를 불포화 탄화수소라고 한다. 앞서 말한 유기화학의 첨가반응은 특정 물질이 포화 탄화수소인지 아니면 불포화 탄화수소인지를 알아내는 대표적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브롬수가 있는 B에 불포화 탄화수소를 주입하면 A로 변한다. 오른쪽에서부터 왽쪽으로  보시길…



  2023년 가을부터 겨울 내내, 나는 작은 외부 자극에도 쉽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학생들로 인한 불쾌감은 없었다. 하지만 교무실 내 자리 근처에 있는 동료 교사들의 사소한 얘기들 만으로도 짜증이 확 밀려오는 기분을 하루 종일 유지하기가 일쑤였다. 마치 불포화 탄화수소 액체가 공기 중의 작은 분자와 쉽사리 반응하여 갑작스레 액체 색깔이 확 뒤바뀌는 상황이었다고 나 할까. 어쩔 수 없이 몇 개월 만이라도 직장에서 잠시 벗어나야겠다 결심하였다.


  복직 이후, 원자도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 공백이 있듯이 삶에도 어느 정도의 휴지기가 필요함을 깨닫는 순간을 경험했다.  

(확실히 쉬는 게 최고다.)

 몇 개월 전이었다면 내 심기를 건드릴 뻔했던 상황이 교무실에서 재연되었지만 별 감응이 오질 않았다. 내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던 그 동료 교사와 급식실에서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마음의 동요가 일렁이는 일은 없었다. 맡은 업무도 내 적성과 맞지 않는 생활지도 관련 일이었지만 특별한 불만 거리를 느끼지는 않았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맑은 대로 갓끈을 씻고 물이 더러울 때는 발을 씻으며 관조적으로 사는데 무리가 없다 생각하였다. 그런데 뱃속에 과속 방지턱 같은 것이 턱 걸리는 느낌을 받는 광경을 얼마 전 목격하였다.


  수업 교체 문제로 K선생님에게 문의를 하려고 그 선생님이 담임을 맡은 반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먼발치에서부터 K 선생님은 교실 밖 복도에서 자기 반 학생에게 핏대를 올리며 뭔가를 열심히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다가갔지만 나보다도 어린 K선생님은 무엇이 그리 속상했는지 학생을 혼쭐 내느라 등 뒤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학생과 교사 두 명의 표정만 보아도 K 선생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짐작이 갔다. 대화 내용을 굳이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K 선생님 뒤에서 5분 이상 기다리다 보니 자연스레 그의 말이 들리었다.


  “너. 오늘 또 그렇게 말하더라. 학생들 다 있는 교실에서 선생님에게 그리 말하면 내가 뭐가 되겠니? 아무리 네 주장이 강해도 사람들 있는 곳에서 그렇게 말하면 되겠어 안 되겠어?”


  자초지종은 모르겠지만 그 학생이 K 선생님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해 보였다. 교실에서 학생과 옥신 각신 하다가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K 선생님은 학생을 교실 밖으로 불러내어 본인이 화가 난 이유와 그 화가 쉽게 풀리지 않고 있음을 학생에게 주지시키고 있었던 일련의 상황이 예상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교실 안에 있는 본인 반 학생들에게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확실히 각인시켰으리라.

  K 선생님이 대체 왜 저러나 싶은 생각에 마음의 눈 쌀이 찌푸려졌지만 한편으론 나도 10여 년 전에는 저런 적 있었다는 생각에 짠한 마음도 들었다.


  얼마 전 넷플릭스로 본 영화 ‘전란’을 보면 극 중 선조(차승원 배역)는 조선 백성을 처참하게 주살하다 관군에 의해 붙잡힌 왜군들로 하여금 역도로 추정되는 조선 백성들을 제거하라는 영을 내린다. 하지만 한음 이덕형이 어찌 같은 백성을 그리 할 수 있냐며 부당함을 주장하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궁을 태우고 왕에게 돌팔매질하는 것들이 그게 백성이냐? 그게 사람의 새끼야?”

전쟁때문에 백성이 피폐해도 그저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데만 여념이 없었던 선조

  선조에게는 백성들이 왜 자신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하는 메타 인지 따윈 없었다. 일설에 따르면 선조는 본래 정식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다가 왕이 되는 바람에 자신의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다는 말도 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선조의 자존감이 낮다는 것은 영화 ‘전란’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여러 사극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자존감이 높지 않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걸 자신의 권위와 연결 지어 불안의 요소로 생각하였고 분란이 생기면 원인을 분석하기보단 그저 그 소요사태를 제압하는 것 만이 자신이 할 일이라 믿었다.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이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경청할 수 있는 여유는 없다.


  수업 교체 때문에 K 선생님에게 찾아갔던 그날, 학생에게 훈계하던 K 선생님에게는 학생이 본인에게 왜 고분고분하지 않았을까를 살펴볼 여유는 없어 보였다. 자기 심기를 건드린 아이를 단죄(?)해야겠다는 미션에만 몰두하는 경주마 같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모습이 K 선생님 이외의 교사에게서도 많이 목격되었다.


  아침에 학생이 늦었다는 이유로 교실 앞에서 학생을 야단치는 분. 자기는 딸각거리는 소리가 나는 구두를 신고 다니면서 시험 기간 자습 타임에 떠드는 학생을 나무라는 분.  ‘자율' 학습임이 분명한데도 스스로 불참을 결정한 학생을 복도에 불러내어 책임감 부재를 운운하며 꾸짖는 분. 신체의 자유는 헌법에도 보장된 인간의 권리인데도 학생들의 복장을 제한하는 교칙을 집행하며 학생들을 모독하는 말을 뱉으시는 분들.   마치 외부 물질이 유입되면 여지없이 첨가반응을 하는 불포화 탄화수소처럼 학생들의 조그만 비위를 보면 쉽게 흥분하여 화부터 내는 분들이 내 주변에 자주 보였다. 그중 다수의 선생님들이 하는 얘기에는 다음의 말이 빠지지 않았다.


  “네가 그러고도 학생이야? 학생이 학생다워야지.”


  선조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백성을 향해했던 말의 맥락과 크게 다를 것 없지 않은가.

  복직 이후에도 아픈 학생을 아프게 바라보지 못하고, 되려 강하게 몰아붙이려는 동료들을 보면 마음이 여전히 불편하다.


  나도 아직은 불포화 탄화수소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의 성격에 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네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1. 우리는 고통받고 있으며, 그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

2. 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인식하고 있다.

3. 우리는 우리의 불행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4. 우리는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생활 규범을 따라야 한다.

 (에리히 프롬도 언급했지만 이는 석가모니의 ‘네 가지 진리(사성제)’와도 맞닿아 있다.)

  

  과거 폭력 교사였던 시절의 나는 1번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 2번을 인지하며 내 불행의 원인이 학생이 아닌 나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문학자들과 역사 속의 많은 스승, 그리고 좋은 친구 덕분에 3, 4번을 알게 되면서 10여 년 전과는 전혀 다른 지금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인격적으로 고매한 인간인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10년 전의 나로는 절대 회귀하진 못할 것 같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오늘도 복도를 걸어오는 내 앞에서 학생을 혼내고 있는 교사가 보인다. ‘너 때문에 이게 뭐야’라고 말씀하시고 있지만 적어도 그 교사가 겪는 괴로움의 근원이 학생이라는 타인은 아님을 짐작한다. 다가가서

‘그대의 괴로움은 무엇 때문일까요?’,

'학생에게 교사의 욕망을 투영한건 아닌가요?'

라고 물어봐주고 싶다.


  하 핫. 미친놈 소릴 듣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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