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험과 이론이 만나는 순간
요리를 오래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히는 것들이 생긴다.
예를들면 토마토 소스를 만들 때, 먼저 양파를 충분히 투명해질 때까지 볶은 다음 토마토를 넣는다. 이 '순서'를 오랫동안 지켜왔다.
하지만 왜 그 순서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고, 그저 '그렇게 해야 맛이 좋으니까, 모든 믿을만한 레시피들이 다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정도로 생각했다.
[Salt, Fat, Acid, Heat] by Samin Nosrat 이라는 책의 '산Acid'에 대한 챕터를 읽고 나서 내 모든 경험들과 책속의 이론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Netflix 4부작 다큐도 있으니 참고하길. 그 방송을 보고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산은 채소나 콩류의 식재료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다.
위에서 얘기한 토마토 소스에서 양파를 볶기전에 (산성을 띄는) 토마토를 넣는다면, 보들보들한 양파보다는 아삭한 식감이 있는 양파로 남아있을 수 있다. 그래서 양파를 어느정도 충분히 볶아준 후에 산성 재료를 넣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게 되었다.
집에서 (병아리콩 같은)콩을 자주 삶는데, 콩 삶는 레시피를 접할 때 마다 삶는 물에 베이킹 소다를 조금 넣어 보라고 한다.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그때그때 기분 따라 넣을때도 있고 안 넣을 때도 있었다. 베이킹 소다는 물의 산도를 낮춰 콩을 부드럽게 익히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삶은 콩을 샐러드에 활용할 경우, 드레싱(보통 식초, 레몬등 산성 재료가 들어감)에 섞은 후 다시 콩이 좀 단단해지는 느낌을 받은적이 상당히 많다. 그런 이유로 콩을 충분히 푹 익히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블루베리나 딸기를 사용해서 홈메이드 잼을 자주 만든다. 소량의 레몬즙을 꼭 함께 넣는다. 유튜브 영상을 찍을 때도 "꼭 넣어주세요"라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산이 과일속의 팩틴 성분을 활성화 시켜서 잼의 농도를 잡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한 화학적 원리까지는 몰랐었는데, 책을 읽고나니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 앞으로는 설명할때 더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을거 같다.
수란을 만들때 끓는 물에 식초를 넣으면 모양이 더 잘 잡힌다는 것도, 계란 흰자 머랭을 칠때 크림오브타르타르(와인의 부산물, 산성을 띄는 가루이다) 를 조금 넣으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제까지는 그냥 '그렇게 하면 잘 되더라'는 식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산이 단백질의 응고를 촉진한다는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크림오브 타르타르라는 가루는 자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구입하지 않았었는데, 레몬이나 식초 1-2방울로 대체해서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니 너무나 유용한 팁이다. 나중에 흰자 머랭을 칠 일이 있으면 꼭 활용해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세비체처럼 산(acid)으로 해산물을 익히는 요리를 먹을 때 마다 그냥 '식초에 절여서 익힌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산이 단백질을 변성시키고 수분을 가뒀다가 다시 내보내는 작용을 한다는 것. 너무 오래 산에 담궈놓으면 안되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해산물이 산으로 인해서 부드러워졌다가 수분이 다시 빠져나가며 단단해진다.
나는 식초를 참 좋아한다. 나이가 들수록 입맛을 돋궈주는 산미가 좋고, 다른 여러가지 맛과 함께 음식맛의 균형을 잡아주는 느낌이 좋다. 그런데 오늘은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산(Acid)이라는 것이 맛 뿐만아니라 식감, 조직, 조리과정 전체에 걸쳐서 과학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몸으로 배운 경험들과 책의 지식이 만나서 연결되는 좋은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