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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손내밥 Apr 16. 2024

피할 수 없다면...

더 사랑하라


“아버님의 병명은 루게릭병이 맞는 것 같습니다.”


희망을 향해 붙잡고 있던 남은 한 줄의 동아줄이 가슴에서 툭 끊어졌다.


“네. 차라리 확실히 알고 나니 후련하네요.”

아버님께서 체념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내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마스크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아버님은 2년 전부터 왼쪽 다리에 저림 증상과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점차 다리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왼쪽 발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버님은 은퇴 후 하루에 자전거를 두 시간씩 타시던 분이다. 여름이면 새까맣게 탄 근육을 자랑하며 운동과 외부 활동을 즐기셨다.

하지만 다리가 불편해지면서 자주 넘어지셨고 외부 활동을 꺼려 하셨다. 22년 가을엔 지팡이를 짚고 걸으셨고 23년 가을부터는 집 안에서도 보행기를 잡고 걸으셨다.


22년부터 상급 종합병원을 옮겨 다니며 수십 건의 검사를 하셨다. 검사를 시작한 지 2년 만에야 겨우 병명을 알아냈다.

건대병원 신경과에서 ‘루게릭병’이 의심된다고 했다. 우리는 ‘한양대병원 루게릭병 클리닉’으로 옮겨서 다시 검사를 했다.


아버님의 병명은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이다. 미국의 유명한 야구선수 루게릭이 38세에 이 질환으로 사망해서 루게릭병으로 더 알려져 있다.

루게릭병은 대뇌와 척수에 있는 상위운동신경세포와 하위신경세포를 선택적으로 침범하여 전신의 운동세포가 점차 파괴되는 질환이다. 원인과 기전은 아직 알 수 없고 신경계 퇴행성 질환이다.

10만 명 중 3명 정도가 앓는 희귀병이고 아직까지는 치료법이 없다.

야구선수 루게릭


담당 교수님은 두 가지를 당부하셨다.


“보호자분들이 이 병에 대해 잘 알고 계셔야 하니 앞으로 많이 공부 하셔야 합니다.”

담당의는 우리에게 ‘루게릭병을 이기는 사람들’이란 책자 외에 여러 안내문을 건네주셨다. 다른 사람들 말 듣지 말고 한양대병원 책자와 유튜브를 보고 공부하라고 하셨다.


“체중이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골고루 잘 드셔야 합니다.”

근육량은 기초대사량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루게릭병은 근육이 위축되는 병이므로 기초대사량이 줄어들 거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과다대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더 많은 칼로리를 섭취해야 한다. 체중이 빠지면 병의 진행이 빨라지고 위험도가 증가하므로 체중 유지는 굉장히 중요하다.


교수님은 루게릭병에 대해 전반적인 설명을 해 주시고 ‘리루졸’ 약 처방을 해 주셨다.

리루졸은 세계적으로 루게릭병의 치료제로 허가받았다. 리루졸은 글루탐산 농도를 낮춰 신경세포의 손상을 억제하여 병의 진행 완화를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증상을 좋게 하거나 멈출 수는 없다. 여러 가지 부작용을 동반할 수 있다.


“앞으로 한두 달이 환자와 보호자에게 가장 힘든 시간이 될 거에요."

환자를 위해서는 보호자가 병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재차 하셨다.


시부모님을 시댁에 모셔다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나도 남편도 말이 없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두 달 전 건대 병원에서 루게릭병이 의심된다고 한 시점부터 그 병에 대해 알아봤다. 병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제발 이 병만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운동신경세포가 파괴되면서 전신 근육에 진행성 마비와 위축이 생겨서 호흡이 멈추고 결국 수년 내 사망에 이르는 병. 치매와 달리 정신은 또렷하여 환자도 보호자도 괴로울 수밖에 없는 병. 평균 생존기간이 증상 발생 후 3~5년.


“왜 나에게 이런 몹쓸 병이 걸렸을까.”

아버님의 혼잣말이 떠올랐다.

몇 달 전부터 아버님께서는 전화기도 꺼두고 사람도 만나시지 않는다. 스스로 사회와 단절을 원하셨다. 내 마음이 이럴진대 아버님 마음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아버님은 결혼 후 20년이 다 되도록 나에게 한결같이 다정하셨다. 단 한 번도 내게 싫은 내색을 하신 적이 없다. 늘 며느리를 칭찬해 주시고 응원해 주셨다.


아버님은 유쾌하고 외향적이시라 모임도 많았고 친구가 많으셨다.

불과 이년 전까지 청년처럼 젊고 건강하셨는데... 이럴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슬퍼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아버님의 남은 시간 동안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걸 생각하자.


그래, 피할 수 없다면 더 사랑하자.


내가 지금 아버님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병에 대해 공부하고 아버님께 도움이 되는 음식을 만들어 드리는 거다.

아버님만을 위한 요리를 하면서 아버님과의 남은 시간을 사랑으로 채워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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