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책방에 남자 셋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검정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동양인이었지만 한국인은 아닌 듯 보였다. 한국말을 하느냐고 물으니 못한다고 영어로 답했다. 영어를 하는 억양에서 그들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전형적인 일본 직장인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내 서점을 방문한 첫 번째 일본 손님들이었다. 책을 둘러보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빼들어 중고 책이냐고 물었다. 내가 도쿄에서 구입한 책이었다. 그렇다고 하자 그는 반갑다는 시늉을 하며 옆의 동료와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잠시 후 그것과 다른 책 한 권을 들고 계산을 하려는 그에게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서울은 처음인지, 이곳은 어쩐 일로 왔는지 등등. 그들은 도쿄에서 출장온 회사원들이었다. 평일 대낮 한적한 뒷골목 3층에 위치한 한국의 동네 서점을 찾은 일본 손님 일행이 돌아간 뒤, 나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내가 일본 문학에 눈이 뜬 것은 사 년여 전의 일이다. 2018년 여름, 일본에서 어학당을 다니다 일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접하기 시작했다. 일본어 능력시험을 준비하며 미야자와 겐지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됐다. 그가 쓴 <은하 철도의 밤>의 일부분이 독해문제에 나오면서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90여 년 전에 쓰인 책의 두 주인공 소년의 이름이 조반니와 캄파넬라라는 서양 이름이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일본문학이라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일본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설국>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그나마 제대로 읽지도 않았었다. 내 가게에서 일본 젊은이가 샀던 호시 신이치 책도 일본어 수업 중에 배웠다. <봇코쨩>이란 로봇(책 제목이기도 함)을 진짜 사람이라 여기고 추근거리는 남자 취객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묘하게 괴기스러웠다. 여자 로봇이 술집에서 손님을 응대한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내가 태어난 1958년에 글로 발표됐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렇게 일본어를 배우면서 일본 작가들을 알아갔다. 대부분이 20세기 초 일본을 대표하는 문인들이었다.
도쿄에서 살면서 한편으로는 영화관을 찾아다녔다. 일본영화를 주로 봤다. 일본어를 익히려고 보기 시작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그려내는 수채화 같은 일본 영화의 담백함에 빠져들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란 영화도 그랬다. 사고로 기억력이 80분 동안만 지속되는 수학자, 그의 가사도우미와 그녀의 아들 그리고 수학자의 형수가 영화의 주축이다. 평양냉면의 맛처럼 밍숭밍숭하지만 진한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소수'(prime number)란 1보다 큰 자연수 중 1과 해당 자연수 만을 약수로 가지는 수. 수학 시간에 배운, 기억에도 아득한 그 ‘소수'가 갑자기 내 삶에 훅하고 다가왔다. 다른 어떤 수로도 나뉘어 떨어지지 않은 채 홀로 자신의 자리를 버티는 고독한 수. 소수에 그런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문득 붓다의 말이 떠올랐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우리에게는 부처의 성질이 있으니 인간 개개인은 하나밖에 없는 고귀한 존재라는 가르침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는 지인에게 그 영화 이야기를 했더니 오가와 요코라는 작가의 책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고 알려주었다. 2004년에 발표된 책이었다. 오가와는 NHK에서 방송된 후지와라 마사히코라는 수학자를 다룬 <천재의 영광과 좌절>이라는 프로를 보고 그의 팬이 됐다고 한다. 그후 후지와라가 교수로 몸담고 있던 대학교로 찾아가 인터뷰를 하고 책을 썼다는 후일담도 알게 됐다.
오가와 요코가 텔레비전 방송을 계기로 영감을 얻어 책을 쓰게 된 것처럼 나도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고 그녀의 팬이 됐다. 작가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YouTube에서 <인생에 책을>이란 주제로 그녀가 일본의 어느 대학에서 강연한 동영상을 찾았다. 오가와는 우리는 언어로 된 소설을 읽지만 책을 읽고 느낀 본인만의 감동을 타인에게 말이나 언어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냐고 청중에게 되물었다. 소설이란 언어가 닿지 않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그곳에서 자기만의 안식처를 찾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말이 필요 없다.’라는 말을 흔히 한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통하는, 말 그 이상의 무엇. 글을 도구로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가 한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가 어떤 계기로 작가가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한 미국 작가들의 책을 읽으며 해외문학에 눈을 뜨고 오에 겐자부로의 영향을 받았다는 오가와 요코. 무라카미 하루키야 워낙 유명한 작가라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오에 겐자부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알고 보니 일본에서 두 번째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물이었다. 1994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에는 일본 천황이 주는 문화훈장과 문화 공로상은 거부했다.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와 가치관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오에가 28세 되던 해 뇌장애가 있는 첫아들이 태어났다. 이후 그의 작품에 아들 히카리는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개인적인 체험>은 그 아들이 모티브였다. 아들의 언어는 더디지만 청음이 뛰어난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아침에 눈을 뜨면 클래식 음악을 틀어 아들에게 들려주고 피아노를 가르쳤다. 아들은 작곡가로 성장했다. 본인이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하는 한편으로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하는 오에 겐자부로에게 품격이란 단어가 겹쳐졌다. 인간의 품격은 유전일까, 학습일까.
누군가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책을 통해 우리는 시공을 넘나들고 미지의 인물을 만나고 교감한다. 책을 읽고 나면 나 자신과 책에 관한 대화를 주고받으니 혼자라도 외롭지 않다고. 그렇다. 나는 오가와의 책을 통해 수학자를 알게 됐고 오에 겐자부로라는 소설가와 그의 아들의 존재도 알게 됐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니며 사는 동안 많은 연이 맺어졌다 끊어지고는 했다. 나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새로운 인연을 맺기가 쉽지 않다. 관계를 쌓는 것은 술을 빚듯이 시간과 정성이 들기 때문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책이 이끄는 인연은 지속적이고 항구적이다.
도쿄에는 짐보초라는 동네가 있다. 출판사와 서점들이 밀집한 곳으로 일반 책방뿐만 아니라 중고 서점 거리로도 유명하다. 한나책방 서가의 한켠에는 일본책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 대부분이 짐보초에서 산 책들이다.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산 첫 번째 책이 <어린 왕자>였다. 일본에서는 <별 왕자님>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일본 작가를 잘 모를 때여서 낯익은 어린 왕자의 책 표지를 보는 순간 반가웠다. 언젠가는 읽을 수 있겠지, 하고 집었다. 그 뒤로 짬이 날 때마다 짐보초에 들러서 책을 한 권씩 샀다. 그 일본인이 샀던 호시 신이치의 책도 그랬다. 외국의 한 작은 서점에서 자기 나라 작가의 책, 그것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그 책이 그에게는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진다. 여행지에서 산 기념품일까. 읽고 싶었던 책일까. 아니면 유출된 문화재를 되찾은 기분일까. 그 책의 다음 주인은? 여하간 책이라는 인연에 감사하다. (2022.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