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he stroy begins, 고된 만큼 가치 있는 여정
오늘은 꿈을 찾기 위해 걸어온 그동안의 제 여정을 툭 터놓고 공유하려 합니다.
누군가에겐 참 쉬운 여정이 제게는 돌고 돌아 이 길이 맞는지 아닌 지 막다른 골목을 확인하며 여기까지 왔는데요.
좋아하는 일을 계속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고, 스스로에게 귀 기울이며 그 방향을 점점 좁혀가고 있어요.
완성형이 아니라 실망하셨나요?
100세 시대인 요즘, N잡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시대.
누구에게나 꿈은 명사가 아닌 동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업을 결정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모두 다르겠지만 저에게 일이란 자아실현, 그를 넘어서는 사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그리고 이 두 가지 접점이 사회에 기여하며, 또 수익성이 있는 일은 찾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된 만큼 가치 있는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시작으로 앞으로 제가 좋아하는 일을 찾는 여정에서 제가 시도한 모든 경험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지금도 좋아하는 일로 더 행복하게 일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건투를 빕니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경험
20살, 수능을 망치며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당시 형편상 재수는 할 수 없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나를 키우는 건 결국 경험일 것이라는 걸.
아니 어쩌면 더 솔직하게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만큼 학교 타이틀을 빼고, 소위 SKY 출신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스펙과 경험을 쌓고 싶었다.
여대에 진학했던 나는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고자 노력했다.(만약 20대로 돌아간다면 더 흥청망청 정신줄을 내려놓는 경험도 하고 싶다.ㅎㅎ)
여러 대학교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연합동아리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대학교 1학년, 15kg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서 국토 일부를 횡단하는 국토순례에 자원했다.
대학교 2학년부터 토익 공부를 시작하고(요새는 당연하지만 05학번인 라떼는 1, 2학년 때 땡땡이가 기본값이었다.), 휴학 후 약 1년간 인도,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나 더 넓은 세상을 경험했다.
그때부터 갖게 된 나의 또 다른 이름, Amy
이젠 취업을 준비해야 할 때인데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
더 큰 세상을 보고 돌아오니 3학년. 여대의 시간은 남녀공학보다 더 빨리 흐른다.
내가 진학한 언론영상학과(소위 신방과)는 pd, 기자, 아나운서 등 당시 방송, 언론계를 꿈꾸며 들어온 학생들이 아니면 홍보 쪽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PD, 기자, 아나운서는 소위 '언론고시'를 통과해야 얻을 수 있는 직업으로 솔직히 나에겐 그만큼의 간절함도 열정도 없었다.
우연 혹은 인연
그래서 홍보 쪽으로 자연스럽게 진로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운이 좋았던 것 같다.
1/ 홍보 쪽 실습수업을 들었을 때 내 적성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힘들지 않았고)
2/ 오히려 그간 나의 대학생활을 반추해 보았을 때,
많은 사람 앞에서 긴장하지 않고 발표하는 걸 즐기는 나는 늘 팀과제에선 발표를 먼저 도맡았고
책을 읽지 않고 리포트를 작성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논술 시험에서 남들과 비슷하게 노력해도 더 좋은 결과를 얻었으며
이로 인해 말 & 글에
특히, 설득하는 말하기 &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는 걸(남들보다 좀 더 수월하다는 걸) 캐치했고,
결국 내 취업 진로 방향은
좋아하는 일보단 잘하는 일을 우선으로 결정했다.
국내 탑 3 홍보대행사에서의 짧은 2개월 간의 인턴 생활
그렇게 대학교 4학년. 교수님의 추천으로 졸업 전 마지막 겨울방학 2개월간 국내 top3 홍보대행사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보통의 팀으로 배정되는 대신 대행사의 신사업팀(말이 좋아 신사업팀이지 차장님과 둘이 일하는 팀, 아니 차장님 보조)에 배정되며 홍보대행사 업무 전반을 볼 수 있는 다른 인턴과는 다르게 주야장천 제안서 작업, 타사 미팅(이 부분은 즐거웠다)이 주 업무였고,
그렇게 다시 시작된 취준생활
방향이 없던 나는 마구잡이로 대기업, 경쟁률이 낮아 보이는 부서 위주로 원서를 썼고(심지어 공채로만) 당연히 모두 광탈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오랜 취준 생활로 함께 으쌰으쌰 하고자 시작했던 취업 스터디.
스터디를 함께 한 스터디원들의 자기소개서와 1분 자기소개(면접용) 멘트를 어느 순간 모두 내가 봐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 심지어 나를 빼고 스터디원 모두 대기업에 합격했다.
어떤 스터디원은 최종 면접날 내게 전화해서 리허설까지 부탁했다(이건 좀 심하지 않냐?)
하지만 막상 나는 1년간 100전 100패였다.
이때라도 내가 말과 글에 재능이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커리어에 대해 좀 더 진지했다면 다른 결과였을까?
그렇게 지난한 취준생활 1년 반이 흐르고,
어느 날 2개월 인턴 생활을 했던 홍보대행사에서 연락이 왔다.
또다시 찾아온 기회, 진짜 사회생활의 시작 - 홍보대행사 AE
함께 일한 차장님이 팀을 새롭게 꾸리는데 리서치 작업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아르바이트해 볼 생각이 없냐며 연락이 왔다.(지금 생각해도 너무 감사하다)
알고 보니 차장님의 상사에게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였고, 잠깐 경험한 업무가 첫 인턴생활과는 다르게 재미있게 느껴져 그렇게 6개월 인턴 생활 후 정규직 전환을 거쳐 AE Account Executive로 내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감사하게도 우리 팀은 신사업팀으로 보통 대행사는 각 팀별로 굳어진 카테고리가 있는 편인데 반해 우리 팀은 이제 막 꾸려진 팀이라 그야말로 정해진 카테고리 없이 다양한 업계, 업무를 종횡무진 경험하기 좋았다.
다른 팀 동기 인턴은 오히려 꺼려하기도 했지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고, 하나를 꾸준히 하면 금방 싫증을 내는 나에겐 딱이었다.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기관, 상하수도협회, IT(티머니 카드), 대기업 S사 디지털 캠페인, 중소기업 B2B, CSR 캠페인 등 다양한 업계, 업계별 다른 홍보툴을 경험할 수 있었다.
6시까지는 기존 고객사의 업무, 6시부터는 새 고객사 수주를 위한 제안서 비딩 작업을 병행하며 그렇게 열정 페이를 바탕으로 야근의 연속이 이어졌다.
지금도 주니어 때 많은 경험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후배들에게도 얘기하는 이유가 결국 해보지 않으면 겉보기와 다르게 나와 맞는지 아닌 지 알 수 없고, 대리급부터는 어느 정도 커리어 패스가 한 방향으로 정해져 제너리스트에서 스페셜리스트로 쌓아가는 것이 더 안정적이기에 주니어 시절, 경험은 필수인 것 같다.
그렇게 많은 걸 경험했지만 퇴사했다.
아마도 번아웃과 사람에 대한 상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어린 치기에 다시는 대행사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내가 가진 스펙인 영어, 해외를 다닐 수 있는 막연한 꿈에 승무원 준비로 허송세월 1.5년을 보내며 방황했다.
그렇게 방황하는 시간 뒤
결국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다시 말&글이라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모험, 마케팅 사관학교로 불리는 글로벌 소비재 회사 미디어 팀 어시스턴트
하지만 여전히 홍보대행사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사원뿐만 아니라 대리, 과장, 팀장도 모두 함께 야근하는 구조에 미래가 안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역량을 쓸 수 있는 비슷한 업이 어떤 게 있을까 고민하다
나는 홍보에서 마케팅으로 살짝 변주를 주어 구직을 했고,
마케팅 사관학교로 불리는 글로벌 회사 미디어 팀으로 입사했다.
계약직이었지만 영어 면접 과정을 거칠 정도로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는 포지션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번 계약직을 시작하면 계속 계약직으로 전전한다는 주변의 우려와 걱정에도
내가 얻을 수 있는 부분,
마케터로서의 내 잠재력을 테스트하는 것이 명확했기에 도전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글로벌 소비재 회사였던 그곳은 갖고 있는 브랜드만 12개.
내 역할은 각 브랜드별 광고 미디어 캠페인 운영관리, 전사 IMC 프로젝트 지원이었는데
작은 역할이었지만 당시 미디어팀을 총괄하는 부장님과 둘이 일했고,
당시 미디어팀은 BO Brand Operation라고, 즉 직접적인 브랜드 매니지먼트가 아닌 브랜드가 잘 돌아갈 수 있게 서포트하는 운영팀이었기에 자신의 브랜드를 담당하고 있는 BM들이 꺼려하는 포지션이었다.
또 그만큼 미디어에 대한 이해가 깊은(전체를 총괄할 수 있는) 담당자를 내부적으로 배정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에겐 마케팅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이자, 지금 돌아보면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밀도 있는 시간이었다.
전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TV PPL 프로그램 프로젝트가 있었고,
부장님이 퇴사한 뒤, 나는 각 광고 대행사 컨트롤, TV 프로듀서 팀(작가, PD, IMC팀) 컨트롤 + 브랜드 BM과 각 회차별 어떻게 브랜드의 기능을 에피소드와 잘 녹일 것인지 커뮤니케이션하며 돌고 돌아 내게 맞는 옷을 찾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찾아온 위기.
당시 회사는 갖고 있는 브랜드 중 하나가 큰 이슈에 휘말려(일본 방사능)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었고,
우리 팀이 결국 없어지면서 나는 다시 내게 맞는(나를 받아주는) 회사를 찾아 떠났다.
커리어상 가장 큰 위기였지만 가장 큰 기회이기도 했던 글로벌 럭셔리 호텔 브랜드, PR executive
그렇게 마주하게 된 내 세 번째 직장.
여의도에 있는 글로벌 럭셔리 호텔 브랜드 C사의 PR executive.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면접 당시 hospitality 잘 몰랐고,
럭셔리 호텔 브랜드? 더 몰랐다.
내가 C사를 선택한 단 한 가지 이유는
PR 담당자가 혼자이기 때문에 다양한 직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특히, 호텔 규모가 클수록 + 글로벌 브랜드일수록.
내가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한 이해관계자만 해도 손에 다 꼽을 수도 없다.
내부 아울렛: 각 레스토랑 별 매니저, 셰프(각 다이닝 별 타겟이 다르다), 웨딩, 스파, 오퍼레이션 팀(객실, 프론트 등), HR팀(CSR 캠페인 관련), 세일즈 팀, 연회 팀, GM...
국내 매체: 호텔은 희한하게 출입처가 두 카테고리로 나뉜다. 유통팀(중소기업으로 구분될 경우), 여행&레저, 그리고 문화(식음+)
인플루언서: 당시 SNS 인플루언서의 영향력이 점점 커질 때
본사: 본사에서 진행하는 캠페인은 시즌별 연도별 왜 이리 많은지
해외 매체: 글로벌 호텔이기에 한국 시장 대상 B2C도 하지만 B2B도 했다(비즈니스 출장 용)
직무에 있어서도 저렇게 많은 커뮤니케이션 이해관계자와 아옹다옹 뒤섞이며 PR의 A to Z를 모두 경험했다. 그것도 스파르타로.
첫 해는 새로운 직무를 경험하고,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 시간이 빠르게 흘렀지만
어느 정도 직무가 익숙해진 뒤 대기업의 층층시야가 갑갑해졌다.
무엇보다 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구조,
자기 확신을 갉아먹는 근무환경에
스스로 자존감이 떨어지며
다시 한번, 고민이 찾아왔다.
직무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니 이제는 직장에서 내가 무게를 두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찾아왔던 것 같다.
전쟁 같은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기자 미팅을 하던 중 알게 되었다.
꿈의 직장이라 믿었던 여행 전문 홍보대행사
회사 규모는 작았다. 10명 남짓.
다들 외국계 대기업인 C사에서 이 회사를 가겠다고 할 때 뜯어말렸다.
커리어상 중요한 시기인데 C사의 네임벨류로 다른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건 어떠냐며.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게 중요하고, 내가 모든 걸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가는 것에 더 큰 성취감을 느끼는 나에겐 작은 회사가 더 맞는다는 걸.
내 기대대로 작은 회사라 여러 가지 불편한 사항이 있음에도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고(받아들여진다고는 안 했다 ㅎㅎ),
업무 강도에 비해 월급도 나쁘지 않았고,
거기다 업무의 특성상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페루, 터키(이제는 튀르키예), 비엔나, 오스트리아 관광청, 카타르항공, 일본 럭셔리 리조트 브랜드의 홍보를 담당하며 입사 후 1년간 내가 비행기를 탄 횟수만 3번.
무엇보다 해외 출장이 잦은 게 좋았다(복지는 아니지만 ㅎㅎ)
돌고 돌아
내가 잘하는 일과 내가 좋아하는 업계가 만나
시너지를 이루며 꿈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꿈같은 시간은 1년 반으로 끝나고,
인생 최대 위기, 코로나 역병의 시작
가장 타격을 입은 여행 업계에 종사했던 나는
얼렁뚱땅 이렇게 곧 지나가겠지 하며 보낸 첫 해,
생각보다 심각해지며 장기화될 수 있다는 걸 느끼며, 함께 일하던 동료들을 보내고 이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한 해를 보냈다는 공허함에 몸부리 쳤던 두 번째 해,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살 수 없다며 코로나 중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며 일에서도 개인적인 일상에서도 많은 시도를 했던 세 번째 해
코로나가 준 생각의 시간이 업에 대한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그 생각은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얼마나 일을 사랑하는지(코로나 전 일은 나에게 취미이자, 재미이자, 자아실현이자, 일 그 자체이자, 모든 것) 알 것이다.
모두가 다른 업계로 탈 여행 업계를 해야 하지 않냐고 염려할 때,
아무리 고민해 봐도 업계에 대한 내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여행 업계의 다른 회사로 이직도 준비했었다.
그런데 내 요상한 성격.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기보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포지션은 더 이상 관리직 연차인 10년 차 팀장급 직장인에게는 구하기 어려운 포지션이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그렇게 한 곳의 이직 기회가 있었지만 고사한 뒤
어느 순간, 회사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코로나 명상(?)이 불러온 나비효과일 것이다.
코로나로 가뜩이나 부침이 있는 작은 회사는 함께 일하던 팀원들을 다 보내고,
나는 결국 0부터 10까지 내 손으로 모든 걸 다 했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0부터 다 하는데 나한테 남는 건 무엇인지 자연스레 물음표가 떠올랐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내 사업을 시작하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지금 나를 만난다면 그럴 수 있는 성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시에 나는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지나 온 커리어 상 공백이 종종 있었고, 공백에 유독 박한 한국 사회에서 나는 끊임없이 의심받고 공백 없이 커리어를 이어가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럼에도 코로나 막바지인 22년, 기록, 감사일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등등
그렇게 회사원으로서의 챕터는 10년으로 마쳤다.
사업가로서의 새로운 챕터가 열렸다.
돌아보면 나에겐 성장이 멈추면, 즉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더 이상 내가 얻을 게 없다고 판단되면
늘 새로운 곳으로 눈을 돌렸던 것 같다.
마음 맞는 동료와 사업을 시작한 지 8개월
지금은 너무 후회 없는 결정이라고 자신한다.
사업은 할수록 어쩌면 내 꿈에 더 다가가는 일인 것 같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의 강점에 대해 내 역량에 대해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고 나와 더 친해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몸과(체력관리) 마음을(자기 확신) 누구보다 아껴야 한다.
현재는 하던 일을 이어가며 여행&라이프스타일 특화 홍보대행사 대표로 있다.
하지만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거침없이 진행 중이다.
앞으로는 내가 가진 경험을 어떻게 수익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책, 강의, 기고, (유튜브) 그 외에 다양한 가능성으로 나의 한계를 더 시험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