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자가 가장 싫어하는 건 텅 빈 주머니와 대안도 없이 허공을 향해 내지르는 공허한 주장이다. 반면 이상주의자는 못마땅하기만 현실을 긍정적으로 혹은 정당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자를 무척 경멸한다. 돈은 행복하기 위한 수단이거늘 돈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고 돈에 목숨을 거는 이들이라면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에 큰 가치를 두는 이들은 주머니에 돈이 늘 한 움큼씩 있지만 현실을 등지고 사는 이들은 대개 돈이 없다. 왜냐하면 돈을 굳이 모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도 하지 않고 살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은 행복과 불행처럼 동전의 양면과도 같을지 모른다. 만일 삶에서 행복은 없이 불행만 있다면 삶 자체를 포기하는 이들이 줄을 이을지 모른다. 반면 삶에 불행이란 건 없이 행복만 있다면 행복의 참된 의미를 알지도 못한 채 살게 될 것이다. 이처럼 현실과 이상은 서로가 대비되며 특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는 현실의 의미가 더욱 부각되지만 너무 현실에만 집착할 경우 내면적인 인간의 가치는 덮어둔 채 리바이블이라고는 없는 소중한 삶을 먹고 자는 일 혹은 자기 혼자만 즐기는 걸로 보낼지 모른다.
인간이 곤궁할 때에는 의식주만큼 소중한 건 없다. 당장 춥고 배가 고픈데 인권이나 복지와 같은 멀기만 한 문제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한 당장 사는 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가족들이 거리에 나앉을 판인데 명품이나 귀한 예술품 혹은 고상한 취미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삶이란 파노라마는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에서 시작해 가족과 사회 및 세계로 이어지며 그 속의 갖가지 것들은 촘촘히 얽혀 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 현실과 이상 중에서 더 중요한 건 과연 뭘까? 현실이란 것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상을 좌표 위에 올려놓고 현실에 충실한 게 바람직하리라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중 어디에 가까울까? 모르긴 해도 현실보다는 이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이상이란 건 안중에 없이 현실만 쫓는 현실주의자라면 먹고 자고 즐기는 '쾌락주의자'로 전락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을 놓고 늘 고민하는 자라면 쾌락에 빠질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이만큼 발전해 온 걸 보면 현실에 안주만 했던 이들보다 이상을 향해 끝없이 달려온 이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을 걸로 보인다. 만일 인류가 현실적으로 안락하고 즐기는 데만 관심을 가져왔다면 세상은 지금과 달리 제자리걸음만 했을지도 모른다. 현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편안하게 사는 길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아는 반면 이상주의자들은 현실주의자들이 볼 때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사서만 하는 이들이다. 현실주의자들은 상황이 급변할 때마다 임기응변이 뛰어나 말도 잘 바꾸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에 줄도 서지만 이상주의자들은 한번 가진 생각을 잘 바꾸지 않고 고수만 하기에 권력이나 돈과는 늘 거리를 둔다.
일제 강점기 때 통치자인 인본인들과 친했던 이들이 있었고 일본인이라면 쳐다보지도 않던 이들이 있었다. 당시 현실주의자들 중에는 누구도 조선이 해방되리라 생각한 이는 없었고 심지어는 일본이 세계를 손에 넣을 걸로 보기도 했다. 그러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이 되자 현실을 중시했던 이들 심지어 밀정들까지도 자신의 과거행적을 위장하고는 독립을 쟁취하는 데 헌신한 독립투사로 변신하였고 평생 핍박받으며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을 죄다 빨갱이로 몰아버렸다.
만일 2차 대전에서 일본이 승전국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당시의 현실주의자들은 지금보다 더 기고만장했을 것이고 당시의 이상주의자들은 존재의 가치조차 없는 무능한 고집불통으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현실을 등질 경우 많은 고생을 하게 되지만 보상도 받지 못할뿐 아니라 굳이 특별한 보상을 챙기려 하지도 않는다. 그 보상마저도 현실주의자들에게 빼앗겨버리기 일쑤이다. 현실은 누구에게나 무척 중요한 삶의 기반이다. 하지만 이상이 결여된 현실은 삶을 편하게만 할 뿐 공허하게 만드는 스펀지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