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학교에서는 새 학기가 되어 반편성을 하면 신상명세서에 주소나 가족관계뿐 아니라 존경하는 인물, 장래 희망 등을 함께 적도록 했다. 그런 걸 왜 적으라고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자기의 정체성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미래야 정해진 게 아니지만 존경하는 인물이 사업가, 정치가 교육자 혹은 예술가나 문인이라면 자신의 삶도 관련성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만일 장래에 하고 싶은 일이나 직업이 조금 일찍 정해질 수 있다면 노력도 거기에 맞춰짐에 따라 불필요한 시간을 줄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환갑 나이인 나에게 누군가가 "너의 정체는 무엇인가?"라고 불쑥 묻는다면 한 동안 멍해질지 모른다. 현재 나이, 성별, 주소지, 가족사항, 학력 등과 같은 인적사항 말고 나란 인간의 정체성은 과연 어떤 것인가? 나는 3남 1녀인 가정에서 둘째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가서 경영학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군복무를 했으며 대기업에 취업하고 결혼해 가정을 갖고 1남 1녀의 가장으로 사회생활을 하다 은퇴한 지금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그러한 신상 관련 내용보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만의 고유한 인생관이나 세계관일 것이다.
이참에 나만의 고유한 사고체계를 한번 정리해 본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지금까지 살면서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 온 게 있다면 그건 '얽매이지 않는 삶'의 추구이다. 그 얽매임은 법적 혹은 제도적 구속이 아닌 정신적인 구속이다. 형식과 세상의 편견을 포함해 돈이나 권력과 같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남들이 하는 얘기는 나의 삶에 있어서는 참고사항이지 그것에 의해 나의 삶이 좌우된다면 타인의 집에서 살며 자기 이름의 문패만 달아 놓은 꼴이 되지 않을까?
인간이 교육을 받을 때는 주로 책을 통해 사회나 다른 이들의 삶과 생각을 배우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진정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또한 남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등을 성찰할 시간은 제대로 갖지 못하고 산다. 그러다 보니 늘 틀에 갇힌 삶이 된다. 소설 '만다라'에서는 새를 유리로 된 우리 속에 넣어 키우는데 몸이 점점 커져 더 이상 그 안에서는 살기 어렵게 될 경우 "그때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유리를 깨어야 하는가? 유리로 된 우리라는 것은 인간의 삶을 제한 내지 통제하는 틀이 될 것이다. 그 틀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면 더 큰 틀로 바꾸든지 아니면 그 틀 자체를 없애버리는 게 맞다.
인간은 암만 자유로워지고자 해도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나의 육체와 사고에는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들과의 경쟁 속에서 시행착오를 줄이고 나름 만족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경쟁력이 있는 일을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 성공적인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속칭 성공적인 삶이란 공부를 잘해 명문대학을 나와 의사, 판검사와 같은 전문직이나 고위공무원 혹은 대학교수나 사업가가 되어 안정적이거나 부유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나 붓다를 비롯 김수환이나 이태석을 포함해 효봉이나 성철, 법정과 같은 이들은 과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평생 가정도 없이 홀로 또한 돈도 없이 구도의 길만 간 것일까? 그러한 물음은 자신을 얽매던 삶의 틀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낄 때 생기리라 보인다. 이에 대한 자신만의 당당한 대답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 아닐까? 삶의 문제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 책이나 스승을 찾았지만 자신이 곧 책이요 스승이 되는 때가 자신의 삶이란 집에 남이 아닌 자기 문패를 달아도 되는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