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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 Nov 01. 2023

0. 회색빛 보름달

루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오랜만에 당신께 편지를 쓰고자 펜을 잡았습니다. 한동안 종이를 펼치지 못했던 까닭은, 그 단순한 작업을 실행할 수 없을 만큼 힘에 부치기도 했지만, 제가 쓰는 글들과 쏟아내는 말들이 누구에게도 가닿지 못해, 부메랑처럼 다시금 날아와 저를 가격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 큽니다.


자연에 감격할 수 있고,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문명에 전율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질수록, 허무의 늪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삶은 살아낼수록 유한함을, 그래서 한없이 무가치하고, 그렇기에 또 경이롭게 아름답다는 것이 진동을 통해 뼈로 느껴지고, 저는 그걸 덜덜 떨며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성이라는 것은 신념이나 가치,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지금 당장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을 앞세워 무언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허구한 날 생의 처량한 필연만을 탓하며 우울에 젖어있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저 삶이 무엇인지 제게 주어진 능력의 범위 안에서 부유하며 느껴보고, 그걸 글로 기록하고 싶습니다. 그러다 때때로 찾아오는 허무주의에 짓눌릴망정, 눈을 가린 채 세상이 어떤 곳인지 이해조차 시도해 보지 않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이 편지를 당신께 부치고 싶습니다. 지금은 당신과 저 모두 세상이 정해 놓은 이치에 따라 쉼 없이 돌아가야만 하는 공장의 부품과 같기에, 제 글을 읽어달라 무리한 부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엔가 당신과 저, 둘 다에게 적당한 시기에 용기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설령 제 소소한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제 존재의 소망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것들만큼은 당신께 가닿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해서 바람 같은 존재가 되어 누군가의 살결에 잠시나마 가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제 편지들이 존재와 함께 소멸한다고 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생이랑 본래 그런 것임을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럼 종종 편지 올리겠습니다.


2023년 회색빛의 거대한 보름달이 떴던 추석 다음 날 오후에 헤이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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