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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칼리 Nov 18. 2024

42.5

귀여운 딸의 귀여운 단원평가 점수

우리 딸은 작고 귀여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쓴다. 최애 산리오 캐릭터인 시나모롤은 인형부터 피규어까지 그 크기와 종류도 헤아릴 수 없다. 초등 고학년이지만 부들부들 애착이불에 코를 박고 미피 인형을 안고 잔다. 우리 딸도 작고 귀엽다. 요즘은 감탄사로 힝구힝구를 달고 산다. 반짝이는 눈으로 유튜브를 들여다보는 것도 색지를 이용한 만들기 영상, 슬라임이 몸에 안 좋다는 엄마 말을 듣고 슬라임을 대체할 우블렉(전분가루로 만든) 만들기 영상 정도다. 갈래머리하면 흡사 시나모롤 같은 딸내미는 요즘 단원평가가 무섭다. 사회 시간에 역사를 배우면서 죄 낯선 이름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쉴 새 없이 등장하고 있단다. 단원평가 칠 때면 잔뜩 긴장해서 머리가 하얘진다는데.

너무 어려웠단 말이야!


시험지 위에 큼지막한 42.5. 한숨이 나왔지만 그 한숨은 다행히 문 너머 안방과 딸 방의 거리 5.24m를 넘지 못한다. 입이 바짝 말랐지만 마른침을 삼키며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건넸다.


"괜찮아. 실망할 거 없어. 이제 공부하면 되는 거야. 점수보다 중요한 건 우선 틀린 문제 확인하고.."


쾅! 아이는 '괜찮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무 일 없다는 듯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부르며 제 방에 들어가고 없었다. 나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린다. 과정이 중요한 거잖아? 꾸준히 해나가면 되는 거지. 안 괜찮지만 괜찮아.



지난여름, 이 귀요미에게 초경이 시작됐다. 성장 체크를 위해 다니던 대학병원 소아청소년과에서는 피검사를 하고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힐 것인지 결정하라고 했다. 엎친데 덮친다더니 초경에 성장 주사까지. 초경이 시작되면 10cm 크기가 어렵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 아이보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됐던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게다가 1년 반동안 매일 주사 치료를 하면 기대키보다 2cm 더 클 수 있다고. 세상에 5cm도 아닌 2cm라니.


아이 아빠, 아이와 함께 고심 끝에 주사치료는 안 하기로 했다. 우선, 주사까지 맞고 키 커야 하는 이유가 와닿지 않았던 아이가 주사를 거부했다. 대안을 찾아 성장클리닉에서 인바디와 체내 성분 검사를 통해 키 클 수 있는 요인들을 관리해 나가기로 했다. 148.5. 작고 귀여운 딸내미는 나와 한 뼘 차이가 난다. 우리 딸은 이제 싫어하는 우유도 먹고, 견과류도 챙기고, 줄넘기도 한다. 엄마보다 크고 싶단다.


아이는 요즘 집에 오자마자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 노크하고 들어가 보면 뭔가를 열심히 끄적이고 있다. 오늘은 노트북을 안고 끼적대는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와 소리친다.


엄마, 이거 봐봐. 나 오늘 할 일 다 했어


아이 손에 이끌려 간 책상 위에는 주간 플래너가 놓여있었다. 며칠 전부터 쓰기 시작해 요일도 안 맞추고 맘대로 쓰고 있지만 어제도, 오늘도 할 일을 스스로 계획해서 모두 다 끝냈다. 아이의 얼굴은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가득 차있었다. 기뻐서 생글거리는 눈을 보고 한 뼘 아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한 뼘. 엄마는 이 한 뼘에 42만 5천 가지의 이야기를 쌓아가고 싶단다. 너는 끄적끄적. 나도 끼적끼적. 오늘도 한 발짝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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